[원신 단편 팬픽] 초전도 반응

"그쪽으로 보낸다, 잘 받아!"

아라타키 이토는 섬이 떠나가라 외치면서, 자신의 도깨비 방망이를 몸 뒤로 크게 젖히며 준비 태세를 갖췄다. 다른 슬라임을 처치하고 있던 쿠키 시노부는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콰앙, 하고, 이게 슬라임을 때리는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큰 타격음이 시노부의 몸을 짜릿하게 울렸다. 얼음 슬라임 하나가 바둥바둥 끓어오르듯 발광하면 정확히 시노부 쪽으로 날아왔다. 하여간 형님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며칠 전에 어느 제목 긴 라이트 노벨에서 본 '연계기' 라는 단어에 이렇게까지 꽂힐 줄 알았다면 진작에 형님에게 라이트 노벨 금지령을 내렸을 것이다.

"울림풀 고리!"

쿠키 시노부의 은빛 한손검이 염색을 하듯 번쩍이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곧이어 그 보랏빛들은 마치 채찍처럼 하늘을 가르며 얼음 슬라임을 둘러쌌다. 뒤이어 채찍의 뒤를 따라오는 것처럼 날카로운 번개가 보랏빛을 흡수하면서 채찍의 궤도를 따라갔고, 그 번개가 얼음 슬라임과 닿자마자 마치 얼음을 어금니로 씹어먹는 것 같은 폭발음이 슬라임을 감쌌다. 냉기가 만들어낸 연기가 땅속으로 뭉게뭉게 사라질 즈음 시노부는 얼음 슬라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시노부는 원래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힘 다 빠진 다른 슬라임을 앞차기로 날려 몸통을 두 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이야~ 오늘도 수고했어! 이 맛에 싸운다 이 말이야!"

이토는 껄껄대며 시노부에게 다가와 등짝을 쩍 하고 때렸다. 소리만 컸지 아프지는 않은 공격이었다. 시노부는 검을 팔꿈치 안쪽으로 스치듯이 닦아 슬라임 조각들을 말끔히 정리하고서는 검집으로 소리없이 집어넣었다. 코등이와 검집이 부딪쳐 찰강 소리가 났다. 마치 전투가 끝났다는 신호음 같았다.

"형님. 이런 것도 한두번이지, 원래는 한 명씩 순찰하는 거잖아요..."

"아니, 아니. 알아. 나도 나오면서 얘기했잖아.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원래 두 명이 두 구역을 관리해야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인원 부족이 되어도 할 말이 없는..."

"미안... 그래도 멋있고 깔끔했던 건 인정하지? 라이트 노벨이라고 해서 꼭 오락적인 요소만 있는 건 아니라니까."

속으로 시노부는 조금 놀랐다. 이 형님 치고는 꽤나 고급스러운 표현이었다. 다만 원래 한 사람이 담당할 구역을 두 사람이 같이 다니니까 좀더 전투에 효율성이 생긴다는 것을 굳이 짚어내지 않기로 시노부는 결심했다. 이토 형님과 대화하면서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거짓말 좀 섞어서 전투할 때보다 더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보니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이제 아셨어요."

"아니, 야! '내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농담인 거 아시잖아요."

"... 그래. 농담이지. 그래. 계속 이야기해도 될까."

"알겠어요."

이토는 가래침 대신 헛기침을 한번 내뱉고는 검지손가락을 뻗어 방금 전 울림풀 고리가 일으킨 폭발 자국을 가리켰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냉기가 바닥에 푸욱 깔려 있었고, 주변 웅덩이 일부는 꽁꽁 얼어붙은 채 날씨에 맞춰 송글송글 차가운 땀방울을 내며 자신을 녹이고 있었다.

"방금 그거 말이야... 폭발한 거지."

"엄밀히 말하면 폭발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그렇죠."

"왜 폭발한 거야?"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지? 시노부는 이토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얼음 원소를 머금은 슬라임이 번개 원소의 공격을 받으니까 그렇죠."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오늘 갑자기 딱 하고 떠오른 거야."

"뭐가요?"

"대개 폭발한다, 라는 건 터진다는 거잖아? 그 뭐야, 나가노하라 댁의 폭죽처럼."

나가노하라 댁이라는 건 이나즈마의 폭죽 전문가인 나가노하라 씨를 말하는 거였다. 지금은 장인께서 폭죽을 만들 만한 건강 상태가 아니라서 그 딸아이가 대신 업무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얼음 슬라임하고 무슨 관계일까. 시노부는 조금씩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토 형님의 아이디어는 가끔씩 기발할 정도로 이상한 방향으로 통통 튀고는 했으니까.

"얼음도 번개도 불 원소가 아닌데, 왜 얼음 원소랑 번개 원소를 맞추면 폭발이 일어나는 거야?"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엄밀히 따지면 폭발은 아니에요. 그거는 초전도라는 반응이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노부는 아차 싶었다. 형님이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는지 스스로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초전도가 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남에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게다가 그 설명을 듣는 상대방이 이 아라타키 이토 형님이라면 더더욱. 것보다 원초적인 문제가 있다면 질문의 내용 그 자체였다. 초전도라니. 얼음하고 번개가 만나면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게 뭐지. 그게 문제였다. 번개 원소를 이용하는 쿠키 시노부도 그 초전도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었나. 자연현상이잖아. 사람이 왜 숨을 쉬냐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질문 아닐까.

"형님."

"어?"

"그거, 정말로 궁금하신 거 맞아요?"

"궁금하니까 물어본 거지?"

"다음날 되면 까먹고 그러시는 거 아니죠?"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형님으로 보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시노부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가면 안쪽에 자신의 한숨이 따뜻하게 굴러다니다가 가면의 틈새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형님은 무식하지는 않다. 단지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뿐이다. 오니(도깨비) 의 특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형님은 인간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기에는 아직 인간으로서의 지식이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이것저것 알려주거나 지적해주거나 고쳐주거나 했었지만, 이번 경우는 뭘까. 어떻게 대답해줘야 되는지 난감해졌다.

"그러니까... 형님, 원소 반응이라는 건 아시죠?"

"어...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이토 형님은 바위 원소를 다룰 수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바위 원소는 다른 원소들과 특별히 반응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원소 결정을 만들어 사용자나 주변인에게 보호막을 씌워주는 효과 정도. 그렇게 생각해 보면 '원소 반응을 모른다' 는 답변이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시노부의 고민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른다고 했으면 대충 얼버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얼음 원소가 있고 번개 원소가 있어요."

이토가 마치 옆집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에 번개를 쬐면, 그 원소 반응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오늘은 쉽게 넘어가긴 글렀구나, 하고 시노부는 속으로 아까보다 훨씬 깊게 한숨을 쉬었다.

"예를 들어서 증발이란 건 그 뭐야. 물 원소에 불 원소를 붙이는 거잖아. 그러면 물이 끓듯이 증발이 일어나는 거고."

"반대의 경우도 되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죠."

"같은 원리로 물 원소에 번개 원소를 묻히면 감전이 되는 거다. 여기까지는 맞지?"

"... 놀랍게도요."

"그러면 얼음 원소에 번개 원소를 붙인 초전도라는 건 뭐냐 이 말이야."

아까도 입밖으로 꺼낸 말이지만 놀랍게도, 아라타키 이토는 원소 반응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도 생각한 것이지만 놀랍게도 이 형님의 아이디어는 가끔씩 기발할 정도로 이상한 방향으로 통통 튀고는 한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사람에게 해초를 키우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

"시노부도 잘 모르겠어?"

정곡을 찔렸지만, 딱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왠지모르게 이 형님에게 '모른다' 라고 인정하는 건 싫었다. 형님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금방금방 물어보고 가끔은 답변을 들었으면서도 깜빡하는 성질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물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나? 혹시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했다가 그래 시노부도 모르는 게 있구나 하는 형님의 반응을 보는 것은 그녀로서는 은근히 자존심에 상처가 날 일이었다.

"알려드릴 수는 있는데요. 형님이 이해하실지 잘 모르겠어요."

"언제나 그걸로 고민하는구나. 어쩔 수 없지."

"정말로 궁금하시면 조금 쉽게 설명할 방법을 만들어올 테니까, 하루이틀만 기다려 주세요."

"뭐, 그래."

"또 저번처럼 내가 그런걸 물어봤냐면서 시침 떼시면 안됩니다."

"어? 내가 그렇게 반응했었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요..."

그 날 아라타키파의 하루 일과 (라고는 해도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아직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가 끝나고 나서 아라타키 이토와 헤어진 뒤, 쿠키 시노부는 아무도 안 보는 사이에 벚꽃나무 위로 올라가 잠시 턱을 괴고 앉았다. 해가 거의 다 저물어가서 이제는 푸른빛 어둠이 더 짙게 보이는 하늘이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 보였다.

티바트. 7원소. 각 원소를 주관하는 신들. 그리고 그들의 힘이 서로 부딪쳤을 때 나오는 상호작용. 그것을 원소 반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실 원소 반응에 대한 내용은 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라이덴 쇼군 님에게 직접 가서 물어볼 수 있을 리는 없다. 쿠죠 사라 님은 항상 바쁘시니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만나뵙긴 좀 그렇고. 원소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자면 카미사토 가의 백로공주님도 초전도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아시겠지만 역시 직접 찾아뵙긴 좀 어려운 분들이다. 야에 궁사님... 이 있는 곳에는 별로 방문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대상을 이나즈마 밖에서 찾아야 되는데. 연비 선배님은 불 원소인 데다가 법률가셔서 잘 알지 못하실 것 같다. 몬드에는 연금술사들이 몇명 있다고는 하지만 몬드에 아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좁았나 하는 자괴감이 살짝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인간관계가 좁은 편은 아니었다. 단지 '「신의 눈」 을 가진 자들'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이고, 그건 온 세상 사람이 대부분 다 그랬다.

여행자.

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들어 시노부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떨어지는 벚꽃과 함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고, 나무기둥에 반쯤 걸터서서 시노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행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흔치 않은 금발, 이나즈마는커녕 세상 어느 나라하고도 맞지 않는 이국적인 복장, 본인의 말로는 수많은 세계 (여기서 말하는 '세계' 는 이 대륙만을 칭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를 여행하다가 이곳 티바트에서 단 하나뿐인 혈육과 헤어져 버렸고, 그 가족을 찾기 위해서 온 나라의 신들을 만나고 다니는, 본명은 따로 있지만 '여행자' 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나무 밑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여행자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고서는 잠깐 주변을 둘러봤다가 가볍게 시노부가 앉아있는 나뭇가지까지 뛰어올랐다. 다행히도 나뭇가지가 두꺼워 두 사람 정도는 버텨 주었다.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뭐 하냐는 시노부의 질문에 여행자는 그래도 체면이 있지, 라고 대답하며 방긋 웃었다.

짧은 환기용 잡담을 조금 나눈 뒤, 시노부는 여행자에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고민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여행자는 많은 세계를 여행해 봤으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하면 쉽고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지 알 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 같지도 않은 것 같은 고민을 여행자는 진심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줬다. 시노부는 저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도 저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었다. 내용을 알긴 하는데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을 때이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날고기는 여행자라도 쉽지 않은 작업인 모양이었다. 자기가 느끼기에 여행자는 아직 얼음 원소를 사용하는 법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여러 가지 원소의 힘을 알고 있다면 그 힘들이 반응하는 방법도 원리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자신이 너무 많이 나간 것일까, 하고 시노부는 문득 생각했다.

갔다 올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행자는 몸을 일으켜 나뭇가지 위에 두 다리로 서서는 그렇게 말했다. 갔다 오다니, 어딜? 알 만한 사람한테. 내일까지 대답해주기로 약속했는데. 내일까지 돌아올게. 그러고 보니 시노부는 생각났다. 여행자는 세계 곳곳에 있는 정체불명의 돌기둥,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가끔씩 걸어다니기 귀찮거나 힘들 때 그 워프 게이트를 사용해서 다른 돌기둥의 위치로 자신을 순간이동시킬 수 있다고 했었다. 아직 아는 사람 중에 그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여행자 외에는 한 명도 없었다.

내일 점심 때 즈음에, 이 나무에서 다시 만나자.

여행자는 자신만만하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잡았다. 자신이 알맞은 답을 알아오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눈이 번뜩 띄일 아이디어를 가져오든, 여행자라면 왠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혼란했던 이나즈마를 평화롭게 만들어준 것도 여행자였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라 전체가 봉쇄되었던 안수령과 이토 형님의 궁금증 해결해주는 걸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너무 균형이 맞지 않는 건가. 사건의 중요도를 보지 말고 그 사실 자체만 보자 하고 시노부는 몰래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리고서 일과는 상관없이 친구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의외로 다음 날 정오, 쿠키 시노부는 여행자 대신에 코마니야의 특급 배달부 키라라를 만났다. 그녀는 '취급주의' 라고 상자 반만하게 써져 있는 글씨를 수령인이 잘 볼 수 있도록, 아이들이 차고 노는 공 정도의 크기의 골판지 상자를 허리춤에 둘러안고 있었다. '이나즈마 성 상점가 입구의 워프 포인트, 바로 옆에 있는 벚꽃나무' 라는 이상한 주소는 택배하면서 처음 봤다는 키라라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 그녀가 받을 수령 확인서의 평가란에 별 다섯개를 예쁘게 그려 건네 주었다.

"그래서... 이게 뭐라고?"

시노부는 이토 형님에게 일정을 물은 후, 자신이 있는 곳으로 형님을 불러내었다. 딱히 큰 이유는 없고, 이토 형님은 좀더 몸을 움직여서 조금이나마 게으름이나 놀기 좋아하는 성격을 고쳐내야 한다는 생각이 시노부의 몸에 무의식적으로 배어있었다. 형님이 온 후 두 사람은 혹시 아주 낮은 확률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물건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보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손바닥보다 조금 큰 길쭉한 팔각형 녹색 수정이라는 걸 보고서 이토는 그렇게 물어봤다. 물론 시노부가 답변을 알 리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어요?"

"음... 「번개 원소로 활성화시키세요」 라고."

"번개 원소..."

시노부는 잠깐 악의없이 이토를 한번 쳐다봤다가 손바닥 위에 있는 녹색 수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낸 곳은 수메르였고, 보낸 사람은 일단 여행자이긴 했지만, 어째서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이런 정체불명의 물건을 그것도 택배로 보내온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의심하지는 않았다. 여행자라면 뭔가 생각이 있을 거다. 시노부는 이번에는 조금 악의를 담고서 이토를 쳐다봤다가 다시 수정을 바라보았다. 직접 오지 못한 것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번개 원소로 활성화시키라고 했었지.

"그거 설마 폭발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으니까 형님은 조금 뒤로 물러서 주세요."

이토는 히익 하고 기겁하며 다섯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났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터질 리가 없다. 이게 만약에 폭발하는 거라면 번개 원소를 쓴 당사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을 거다. 여행자가 그런 짓을 할 리도 없을 뿐더러, 실수로라도 그런 문제가 있을법한 도구를 사용하거나 남에게 사용하게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시노부는 마스크 속에서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수정에 아주 조금 번개 원소를 주입해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필요한가.

파삭, 하면서 수정이 조금 더 밝은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수정 위쪽으로 옅은 녹빛이 퍼지며 그 안에서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타났다고는 했지만 완전히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얼음의 속을 들여다볼 때의 얼음 같은 느낌, 반투명. 실제 사람이 그곳에 있는 건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손으로 살짝 만져 봤지만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 것처럼 손가락이 살짝 여자아이의 모습을 일그러뜨렸다. 뭐지. 새로운 통신 기기일까. 수메르에서는 이런 기술이 있는 걸수도. 나중에 공부 목적이든 뭐든 한번 방문해보자 하고 시노부는 느닷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시노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는 다시한번 그 여자아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겉모습으로만 보기에 나이는 사유보다 아주 조금 더 연상인 느낌. 흰색에 가까운 은발, 왼쪽으로만 묶은 묶음머리, 전반적인 복장은 흰색, 그것을 강조하는 자그마한 초록색 장식물들. 정성스럽게 연마한 보석과도 같은 초록빛 눈동자는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 안녕, 아라타키 이토 씨, 그리고 쿠키 시노부 씨.

그 모습이 갑자기 자신들의 이름을 불러 이토도 시노부도 깜짝 놀랐다. 이토는 이것이 폭발성 물체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이 아이는 누구길래 우리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곧 마음이 안정됐다. 여행자가 보낸 물건이다. 이 아이하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어쩌면 이 아이가 여행자의 부탁으로, 혹은 이름을 빌려 보낸 걸 수도 있겠다. 그렇게까지 판단이 닿고 시노부는 안심하며 그 아이가 나타나고 있는 녹색 수정을 한 손에서 두 손으로 바꿔 떠받쳤다.

... 여행자에게 이야기 들었어. 초전도 반응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 아,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수메르에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났어. 지금 보는 내 모습은 내가 여행자의 부탁을 받고 스스로 만들어 보내는 거야. 수정의 크기가 작아서 많은 힘을 담을 수는 없었어. 세 번 정도 재생하면 평범한 수정으로 돌아갈 거니까, 혹시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따로 적어서 남겨 놓거나 잘 기억해 주길 바랄게.

... 그게 어떤 내용이든, 지식을 쌓는 건 올바른 일이야. 지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 같은 거거든. 어떤 색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이 세상을 다양한 색으로 바라볼 수 있어.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건 관점을 여러 갈래로 가질 수 있다는 거고, 그건 곧 삶의 선택지를 더욱 많이 만들어주거든.

... 원소 반응은 자연적인 현상이라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여행자가 부탁했던 대로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줄게.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이다' 같이 이해해 주면 정말 고마울 거야.

"이게 뭐야. 전화기 같은 건가? 수메르 물건들은 대단하네..."

"형님, 쉿."

... 초전도 반응을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를 정의할게.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존재의 정령' 이 들어있어. 이 정령은 어떠한 존재를 그 존재로서 있게 하는 아이들이야. 이 정령은 너무나도 작은 크기라, 그 존재 안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돌아다닐 수 있지만, 그 존재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어.

... 번개 원소를 반응시킨다는 건, 번개를 그 안에 흘려넣는다는 얘기야. 그 번개는 활발히 돌아다니는 존재의 정령들을 힘겹게 헤쳐나가면서 사물에 번개의 힘을 전달하지. 그리고 존재의 정령들이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번개의 힘은 전달되기 힘들어져.

... 얼음 원소를 반응시키면, 이 존재의 정령들은 너무나도 추워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려. 그렇게 되면 번개의 힘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하게 그 힘을 사물에 흘려보낼 수가 있지. 존재의 정령들을 헤치느라 손해를 봤던 힘까지 완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거야. 이걸 초전도라고 해.

... 가장 쉽게 알아보려면 얼음 슬라임에 번개 원소를 반응시켜 봐. 슬라임에 들어가는 번개의 힘은 원래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불쌍한 슬라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아파할 거야.

"아, 이거 어제 그거네."

... 설명은 여기까지. 모르는 게 이해가 됐을까? 그리고 자기가 아는 것과 그걸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지? 여행자가 시노부 씨에게 남긴 말을 마지막으로 전할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주지 못해 미안해. 풀의 신님이 쉽게 설명해 주실 거야. 다음에 만나면 경단 우유 마시러 가자.'

"뭐?"

"풀의 신!?"

시노부도 눈이 동그래졌고, 이토는 행동 자체가 동그래졌다. 마치 라이덴 쇼군을 만난 것처럼 기겁하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풀의 신이라면 수메르를 관장하는 신, 지식의 신이라고도 불린다. 여행자, 아니 여행자 이 인간이. 호기심에 궁금한 거 하나 물어보려고 수메르까지 간 것도 대단한데 그걸 신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신께서 직접 답장을 보내게 만들다니. 시노부는 허허 하고 자기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아이, 아니, 풀의 신님의 모습이 사라지고 수정의 빛이 옅어졌다. 완전히 꺼진 게 아니었고 수정 안에 마치 물방울 같은 빛이 아른아른 수정의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방금 이야기에 따르면 앞으로 두 번 정도는 다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겠지. 아라타키 파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볼까. 시노부는 조심스럽게 수정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 진짜 그게 풀의 신이라고? 나 라이덴 쇼군 말고 다른 나라 신은 처음 봐."

"저도 그래요... 설명은 어떻게, 잘 이해하셨어요?"

"어... 대충 알았어. 초전도 반응이라는 거지. 그런데 이게 왜?"

"네?"

"풀의 신님이 왜 내 이름까지 부르면서 이걸 알려준 거지?"

"어제 형님이 물어봤잖아요!!!"

시노부의 관자놀이에 빠직 하는 소리가 났다. 라이트 노벨 식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번개 원소가 분노에 차 모이는 소리였다.

그날 밤에 쿠키 시노부는 한 번의 기회를 써서 그 수정에 담긴 영상을 다시 한번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풀의 신, 공중에 떠 있는 반투명의 모습, 초전도 반응에 대해 설명하는 초록빛 여자아이, 풀의 신, 지식의 신. 과연,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가장 다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식을 쌓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고, 삶의 선택지를 더욱 많이 만들어 준다. 무녀 일을 그만둔 뒤로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고, 지금은 아라타키파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 동안 그 의미 그대로 세상을 다양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이것은 그녀만의 가치관이었지만, 풀의 신님이 이것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이 왠지모르게 좋은 기분이었다.

지식이라. 오랜만에 연비 선배님께 편지라도 보내볼까.

시노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면을 벗고 천천히 잠자리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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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창작 하면 원신 팬픽만 쓰고 있는데 확실히 팬픽이 쓰기가 편합니다 이미 설정같은게 웬만큼 다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 주제는 초전도 현상이었습니다. 다른것도 아니고 왜 하필 초전도 반응을 주제로 삼았냐면, 이 소재를 생각한게 한참 우리나라에 상온초전도체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던 때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그게 몇개월전이지? 아니 년수로 따져야 되나?

최종목적은 '초전도 현상' 을 '티바트 세상에 맞게' + '설명하는 인물의 성격에 맞게' 설명해 보는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명하는 인물은 구상 맨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고, 초전도 현상이 뭔지 물어보는 바보 역할이 한명 필요했기 때문에 조연으로 한명, 그리고 그 조연과 항상 붙어 다니는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명 넣었습니다. 제 팬픽에서 여행자가 주인공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 글에서도 여행자 등장하는 장면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루미네로 설정하고 싶지만 공식이 아이테르라면서요. 공식이 뭘 알아...

노엘편과 설탕편에 비해서 쓰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는데 이거는 딱히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진짜 생각하는 속도랑 비슷하게 문장이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그게 전혀 안되네요. 안써서 퇴화한건지 아니면 능력을 상실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글쓰는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는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이지만 저로서는 설탕 편에서 한번 썼던 '과학' 소재를 한번 더 써먹는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좀더 길게 쓰고 싶었는데 예상했던것보다 일찍 끝나버려서 아쉬웠습니다. 작중에 이름만 등장했던 인물들이 죄다 나오면 만족했으려나? 초창기에는 한명한명 찾아가서 각자의 시점으로 설명하는 그런 느낌을 바랐는데 그렇게까지 하기엔 너무 스케일이 커져서 못했습니다. 봐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뵐 수 있다면 언젠가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같은 카테고리의 밑에 있는 노엘편 설탕편도 많이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