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그리고 게임에 관한 개인적인 견해들

호요버스(미호요) 게임사의 대표작 《원신》

요즘 재밌게 하고 있는 게임인데, 요새는 이 게임을 하루 종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낸다. 확실한 현실 도피 행위지만,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그러고 나면 내 캐릭터가 조금씩 강해지고, 그걸 보면서 소소한 만족감을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게임에서는 그 외의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멍 때리고 버튼만 누르면 됐다. 그 사이에 앞날에 대한 고민이라던가, 외로움에서 오는 고독감이라던가, 마찰뿐인 인간관계라던가, 그런 건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며칠 전까지 느꼈던 커다란 우울감이 거의 사라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정확히는 내가 정말 우울했었나 싶을 정도로 지난날에 대한 현실 감각이 모호해진 느낌이다. 멍하니 게임을 하고 오니 머리까지 텅 비어버린 느낌인데, 평소에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던 내게 게임은 생각보다 굉장한 두뇌 청소의 기능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게임을 할 때는 집중력이 미친 듯이 솟아나서(왜냐면 재밌으니까) 잠을 깨는 데에도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여준다. 커피를 마셔도 2~3시간은 지나야만 졸음이 슬몃 가실 법해지는 내게 있어 단 5분 만에 졸음에서 완전히 깰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은 지금 당장 놀라 자빠져도 모자랄 일처럼 느껴진다.

《원신》, 이 게임은 소위 ‘씹덕겜’이라고 불리는데, 캐릭터의 디자인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요즘의 모에한 일본 애니메이션 요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주 타겟층 또한 그러한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정조준 되어있다. 나는 애초부터 이런 게 취향인 씹덕이기 때문에 굉장히 즐겁게 플레이하고 있다.

《원신》 설탕

이 게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설탕’인데, 우리가 곧장 생각하는 그 설탕에서 곧장 따온 이름이지만 영문 번역 이름으로는 ‘sugar’가 아닌 ‘sucrose’가 나와서 꽤나 의아했었다. 얘를 좋아하는 이유는 차분하고 내향적인 성격인데 예쁘기까지 해서 좋았다. 내 이상형의 캐릭터화인 셈이다(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개씹덕같다). 그리고 안경이라는 소품도 이 캐릭터의 개성을 더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모든 게임 캐릭터들이 이렇게 예쁘고 잘생기고 개성 있는 형태로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대형 게임 제작사들의 최신 게임들을 보면 대부분 PC적인 요소를 의도적으로 구겨 넣어서 게임의 주인공인데도 얼굴이 어딘가 찌그러져있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의도적으로 못생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건 단순히 내 추측성 의견이 아니라 실제로 대형 게임 제작사에서 그러한 의도로 캐릭터를 만드는 경우가 있고, 요즘 들어 그러한 경향이 매우 짙다. 그들의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게임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게임에서까지 그 난리를 피워대는 건지는 참 의아하다.

말 그대로 이건 ‘게임’인데, 나만 하더라도 현실을 잊고 싶어서 게임을 하는 건데, 도대체가 게임에서까지 내가 거울을 볼 때 느끼는 것 마냥 주인공 얼굴도 거지같이 구겨져있으면 플레이어가 그 게임을 하고 싶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못생긴 건 현실의 나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게임에서까지 못생겨야만 하는 건지, 어째서 대형씩이나 되는 거대 기업들이 구태여 수익을 거꾸로 거스르는 판단을 하려는 건지도 참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씹덕겜들은 틈새시장 공략의 효과를 톡톡히 해낸다. 이런 게임의 제작자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오타쿠적 성향과 취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데에 전혀 제한이 걸려있지 않다. 캐릭터의 가슴을 수박만하게 만들고 온갖 괴상한 형태의 야한 옷을 입혀놔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만화적 허용이 기본적인 베이스가 되기 때문에 장르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제작자가 가진 어떠한 욕망이 투영되었든 간에 창작의 허용 범위 내에 수용될 수가 있다. 그래서 얼굴도 예쁜데 가슴은 크고 몸은 얄쌍하고, 게다가 성격까지 끝내주는 망상의 집합체 캐릭터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장르의 게임에서 과도한 PC주의처럼 게임에서까지 현실의 요소를 진지하게 묻는 것은 오히려 세계관의 파괴로 이어지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 말인즉슨, 씹덕겜은 PC주의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이것이 씹덕겜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씹덕겜은 개성이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양산한다. 그리고 그 게임을 찾는 플레이어들도 그러한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 게임을 찾는다. 요컨대 씹덕겜은 대놓고 노골적이기 때문에 PC주의가 끼어들을 틈이 없다. 나아가 PC주의가 게임 요소에 끼어들더라도 씹덕겜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외모가 얼마나 뛰어나느냐이지, 그 캐릭터가 얼마나 PC주의로 범벅되어 있는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캐릭터가 동성애자건 양성애자건 혹은 어떠한 형태의 장애를 가졌다거나 그 밖의 무엇이건, 그러한 요소들은 캐릭터의 배경을 장식하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다지 신경도 안 쓸 것이다.

그만큼 씹덕겜이나 씹덕만화 문화는 외모와 같은 직관적인 매력, 독특한 개성과 오타쿠적 취향이 절대적인 것으로 작용되는 시장이라서 그렇다. 때문에 무분별한 PC주의로 범벅된 요즘의 문화 시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씹덕겜들이 다시 보니 선녀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게임을 고를 때 캐릭터가 못생겼으면 그 게임은 아예 하기도 싫어질 정도다. 이 게임의 제작사인 ‘미호요’의 류웨이 대표는 ‘기술 오타쿠가 세상을 구한다!’라는 신념 아래 회사를 설립했는데, 내 생각엔 과도한 PC주의로 게임에서까지 같잖은 도덕심과 정의감을 오용하는 것보다 이렇게 대놓고 변태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혁이와 나눈 디스코드 채팅

혁이는 나와 이러한 대화를 나누며 여주인공 기반의 게임에 대해서도 나름의 비판적 여지를 담았던 것 같은데, 나는 여주인공 게임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그다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PC주의적인 관점에서 여주인공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현실에서 이미 남자이기 때문에 ‘질리도록 남자를 경험해 봤는데 게임에서까지 남자 캐릭터를 해야 돼?’라는 마음으로 여자 캐릭터를 더 선호하는 것이다. 사실 주인공의 성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여자인 경우가 좀 더 매력적이라고 느낄 뿐이다.

뿐만 아니라 《툼레이더》 시리즈와 같이 유서 깊은 여전사 주인공 캐릭터가 활약하는 명작들도 있기 때문에 여주인공 게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 못한 반응일 수도 있다. 물론 혁이가 위 대화에서 언급한 ‘여주인공 게임’이란 건 툼레이더 시리즈처럼 PC주의가 성행하기 전부터 일찍이 여주인공을 앞세워 만든 게임을 제외한 나머지를 지칭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호라이즌 제로던》이나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같은...

*호라이즌 제로던(2017) : 이 게임은 꾸준히 여주인공 ‘에일로이’의 얼굴 모델링이 못생겨서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논란이 있어왔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 : 이 게임은 성 소수자, 페미니즘, 인종 이슈 등 PC를 과도하게 내세워 비난을 받았다.

참고로 혁이도 원신을 하는데(나보다 레벨이 훨씬 더 높다), 혁이는 불과 관련된 캐릭터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취향이 있어서 가장 즐겨 쓰는 캐릭터도 화염과 대검을 사용하는 ‘다이루크’라고 한다.

《원신》 다이루크

여담이지만 내가 가장 애용하는 캐릭터는 번개와 한손검을 사용하는 ‘각청’이다. 오히려 디자인이 예뻐서 좋아하는 설탕은 잘 사용하지도 않는다. 각청을 왜 쓰고 있냐면,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 중에서 그나마 성능이 괜찮은 캐릭터가 얘 밖에 없어서 그렇다... 이 게임에서 각청이라는 캐릭터의 입지는 굉장히 안 좋은 편인데,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서 딜량을 뽑아내는 성능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신은 빌어먹을 가챠 게임이라서 몇 백만 원씩 꼬라박지 않는 이상은 후진 성능을 가진 캐릭터를 가지고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하는 수밖에 없다. 참고로 혁이가 사용하는 다이루크는 성능이 꽤 좋은 편에 속한다. 정말 킹받고 배 아픈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원신》 각청

추가로 ‘쓰레기 캐릭터 각청’의 만렙 직전에 도달해 있는 근황을 본 혁이의 일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