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아카이브와 소년성 (3)

한국영화라는 말을 “한국이라는 영화”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한국영화의 소년성을 두고서 한국사회의 소년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소년’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짚어냄으로써 발전시키는 게 가능하다. 먼저 나는 웹툰에서 연재 중인 [신의 탑]을 언급해보고 싶다. 2010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탑의 바깥에 버려진 소년이 탑을 오른다’는 [헌터헌터]식의 전개로 시작됐다. 여기서 소년은 탑의 ‘바깥’에서 왔다는 점이 강조되며, 작중 인물들에게서 이는 신비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살면서 탑을 한 번도 나가볼 수 없는 사람이 대다수고, 특히나 탑의 밖에서 온 인물들은 모두 탑의 원리법칙에 지배되지 않음으로써 탑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탑이라는 체제에 소속되지 않은 이만이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데, 눈여겨볼 만한 건 주인공 소년이 일종의 생존자라는 점이다. 소년은 부모가 살해당한 채 탑의 바깥에 버려져 있었고 함께 버려져 있던 친구를 따라 탑을 오른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점은 탑의 바깥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탑의 바깥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탑의 주민들이 탑의 바깥을 떠올려볼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인 반면, 주인공 소년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상실되는 ‘바깥’은 탑을 완전히 올라야만 수복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꾸어 말해 소년은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탑에 올랐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바깥’은 이야기의 시작점이 아닌 그 이전으로 넘어가 버린다. 전개를 따라가면, 소년은 탑의 안쪽에 있다가 밖으로 버려졌으므로 어쨌거나 모든 이야기는 탑의 안쪽에 갇혀있다는 점이 밝혀진다.

[세계]의 바깥을 동경하는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013년에 <진격의 거인>의 애니메이션이 출시되고 나서 모종의 논란으로 인기가 사그라지기 전까지 인기를 끌었던 이유 말이다. <진격의 거인>은 공중파 뉴스에 나올 정도로 전 국민에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고, 사람들은 미지의 거대 생명체와 맞서 싸우며 ‘바깥’을 동경하는 모습에 열광했다. 이 만화에서 인류는 벽 안에 갇혀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으며 이 과정은 마치 ‘바깥’을 수복하는 것과도 같았다. “예전에는 인류도 벽 바깥에 살았었다….”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어느 순간 “모든 이야기가 벽의 안쪽에 갇혀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집 안 지하실에 숨겨놓았다는 비밀을 찾아가는 이 여정은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는 과정과 그에 따라 자신의 거인화 힘을 발달시키는 서사와 결탁한다. 그런데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면서 ‘안쪽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한 가치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바깥으로의 탈출을 꿈꾸게 된다. 특히나 세월호 사건을 관통하는 말인 “나오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라”는 ‘안쪽’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사람들 사이에 심어줌으로써 계속해서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벽 밖의 자유를 찾아가는 [진격의 거인]의 서사는 영화 같은 한국, 또는 ‘한국영화’를 살아가는 소년 사이에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생존의 층위가 제거된 만화 속 세상은 오직 ‘바깥’에 대한 갈망만을 남기면서, 이제 소년들은 이 나라를 뜨기를 원했다. 이른바 2014년에 시작되어 2015년에는 공중파에 입성한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출몰이다.

헬조선은 지옥+조선이라는 두 단어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이는 ‘지옥불반도’라는 다른 표현으로 응용되기도 했는데, 지옥과 조선 간에는 ‘벗어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자리했다고 볼 수 있다. “헬조선은 뜨는 것만이 답이다.”라는 말은 “이 나라를 치유하거나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식의 절망이 담겨있고, 이는 이곳이 이미 실패한 세계이므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즉 사람들은 어느 쪽이든 간에 [세계]의 바깥으로 나아가길 추구했으며,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처럼 여기서 중요한 건 대상의 양태이지 주체의 방향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양태, ‘어디’로 가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바깥으로 간다”는 내부의 목소리가 이들의 근본을 차지했다. 소년들이 한국사회를 침몰하는 배로 규정하면서 떠올렸던 것은 “어찌 되었든 간에 밖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자기구호였다. 그러니 여기에는 마땅한 방향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소년들은 [세계]의 개연에 의구심을 풀었지만 되려 그러한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탈출을 체념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는 세월호 이후 잠시나마 불었던 헬조선 붐이 꺼지는 이유가 됐다. 소년들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탈출을 꿈꿨지만, 정작 그 바깥은 바다 한복판이라는 점으로 인해 갑판에만 머무를 뿐이었다. 바꾸어 말해 소년들은 한국사회는 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으로만 규정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태도와 경향, 혹은 관습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부산행>(2016), <반도>(2020)). 결국 소년들은 과거처럼 마땅한 투쟁의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세계의 간극을 파괴하는 길로 나아갔다.

세월호와 헬조선 간에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단서가 연결고리로 붙어있다. 두 단어는 탈출을 중심으로 그것이 가능한 세계를 가정하고 또 서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탈출이 가능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세운다면, 헬조선은 그런 가정을 실험해본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능세계의 완전한 멸망, 전제와 결과가 완전히 들어맞아 버려서 일말의 간극조차 없는 디스토피아였다. 이게 바로 대안이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멸망 세계이다. 멸망 세계는 폐허로 이해되기보다는 어떠한 구상도 침투할 수 없다는 점에서의 부정함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헬조선 이후의 한국이 가족, 국가, 친구처럼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방향성을 상실하면서, 소년들은 이제 세계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바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의 탑]의 소년은 이제 탑을 오르는 게 아니라 탑을 무너뜨릴 요령으로 세상과 싸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세계를 구한다는 말은 ‘탈출’이 불가한 상황에서 오직 세계를 박살내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격의 거인]의 2부는 일본만화라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라는 단어를 통해 포스트 헬조선 사회와 결합한다. [진격의 거인]의 2부는 확장된 세계의 범주는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를 그려냄으로써 가능세계를 유토피아화한다. 주인공은 적성국을 방문해 화해와 대화의 가능성을 찾지만, 그곳에서의 목격담은 정해진 [세계]를 바꿀 수 없으며 오직 간극을 해체하는 것만이 진정한 ‘탈출’일 뿐임을 말해줬다. 그래서 이 만화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내부를 배제하는 것, 하나는 바깥을 추방하는 것.

소년병의 입장으로 시작한 이 만화는 가족과 민족을 거쳐 국가와 세계의 문제로 의식을 넓혀간다. 그러나 가족의 선에서 해결되었어야 할 문제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착지인 세계조차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이를 따라 [세계]는 확장의 영역이 아니라 탈출의 영역으로 변모하며, 구제의 영역이 아니라 폭파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소년들이 안락사라는 단어에 반응했던 건 모든 가능성을 배제했을 때 남은 경우의 수는 오직 자신에 대한 가능만이 있어서다. 자살이 자신에 대한 행위이기에 법적인 처벌 근거의 바깥에 자리하듯이, 자기의 문제는 세계의 바깥에 있으며 이를 따라 자기 자신이 더는 확장이 불가해질 때 그곳엔 오직 탈출하는 것만이 가능해진다. 이때 우리는 앞서 말했던 문장을 한국사회에 적용해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 어떤 문제의식의 확장이 불가할 때 그곳엔 오직 탈출의 가능성만이 제기된다. 하지만 [세계]에 간극조차 사라진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에어포켓마저 사라지고야 만다면 이들에게 생존은 곧 세계를 박살내는 것 말고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이라는 영화]에서 소년성이란 소년병의 문제와도 같다. 한국사회가 자신을 설명할 방법으로 영화라는 수사를 택할 때, 영화라는 가능세계가 한국이라는 현실 사회에 따라잡혀 더는 간극이 사라져버렸을 때. 대안이 없고 미래가 없는 세계에서 소년들이 택하는 건 자기살해의 문제, 즉 [세계]의 안락사다. 이들에겐 그러한 꿈을 세계에 강림시키려면 기본적으로 현세계는 파훼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아주 오래된 시뮬라크르 이론을 가져오면서, 인식의 크기가 곧 한계인 매트릭스는 환상의 일종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