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타] ‘밀수’ 조춘자는 정마담과 예림이를 닮았다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해 10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서 활동한 김혜수의 연기력은 지금과 같은 위상은 아니었다. 논란을 빚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20대 시절 소름 끼치게 잘한다는 평가를 받은 배우도 아니었다. 배우보다는 청춘스타에 가까웠다. 스스로의 연기를 점검하고자 했던 2000년대 초반, 드라마 수를 줄이고 저예산 영화에서 노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연기와 작품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 엿보이자 영화계 창작자들이 점점 김혜수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작품이 최동훈 감독의 ‘타짜’다.
‘타짜’에서 김혜수가 연기한 정마담은 화투판에 호구를 끌어들일 뿐 아니라 호구를 쌈 싸 먹을 선수도 섭외하는 설계자이자, 호구를 미인계로 홀려버리는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화투판에 직접 앉기도 하며, ‘아귀’(김윤석 분)와 같은 무서운 인간과도 직접 대응한다. 매우 강한 카리스마와 은은히 풍기는 위트, 도발적인 매력에 더불어 호구를 꾀기 위한 ‘예림이’로 분했을 땐 지극히 여성적이고 귀여운 면모까지 펼쳐야 했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복잡한 내면을 다양한 얼굴로 가진 인물이 정마담이다. 상당한 끼와 재능이 없으면 잘 해내기 힘든 인물이다.
당시 자신의 연기력에 불안이 컸던 김혜수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치열한 고민으로 정마담과 예림이를 그려냈다. 이후에도 수많은 ‘인생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김혜수를 상징하는 최고의 캐릭터는 ‘정마담’이다.
김혜수는 ‘타짜’가 개봉한 지 17년이 지나 비슷한 정마담과 비슷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조춘자’로 분했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에서다. 조춘자는 식모살이하다 문제가 생긴 후 군천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해녀가 된 인물이다. 비교적 정의롭고 순수한 ‘진숙’(염정아 분)의 가족을 만나 행복한 날을 보내던 중 생필품을 밀수하다, 세관에 걸려 도망친다. 진숙과 해녀 가족들에겐 세관에 몰래 고발한 인물로 지목됐고, 군천에선 소문이 흉흉하게 퍼진다. 서울에서도 밀수품을 팔던 조춘자는 밀수계의 1인자 ‘권상사’(조인성 분)에게 위협을 받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시 군천에 와 바닷길을 열기로 한다.
‘밀수’에서 김혜수는 ‘타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 얼굴로 변주한다. 해녀질을 할 때는 누구보다 순수한 시골 촌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다가, 진숙과 우정을 나눌 때는 20대 청춘을 자연스럽게 그리기도 하며, 군천에서 도망친 후 3년 뒤부터는 세상의 단맛, 쓴맛, 똥맛까지 모두 경험한 내공의 소유자로 변신한다. 꽤 성질이 다른 얼굴이 조춘자라는 큰 맥락 안에서 설득력 있게 기능한다. 1970년대 서울 아파트 50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거대 밀수판의 설계자이자, 용서할 수 없는 복수의 지휘자다.
17년 전 그려낸 정마담이 김혜수가 스스로에 대한 불신을 극복해 만든 결과물이라면, ‘밀수’에서 조춘자는 오랫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유와 관록을 마음껏 펼쳐 만든 결과물로 보인다. 힘이 들어가야 할 땐 들어가면서, 빠져야 할 땐 정확히 빠진 상태로 표현해 관객에게 부담을 덜어준다. 감정이 짙게 밴 장면에서도 위트와 유머, 엣지를 잃지 않으며 후반부 감동적인 포인트에서도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권상사와 ‘장도리’(박정민 분), ‘진숙’(염정아 분)과 ‘옥분’(고민시 분)을 깔끔하게 엮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빛깔마저 화려하게 내뿜는다. 류승완 감독은 애초부터 여성 서사의 두 축으로 김혜수와 염정아를 점찍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명확히 설명된다.
두 여성의 연대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감동이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이 ‘밀수’다. 김혜수뿐 아니라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고민시, 김종수 등 모든 캐릭터 선명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바다와 해녀를 소재로 스크린에 펼쳐지는 풍광이 상당히 매력적이며 1970년대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시대상도 신선하게 작동한다. OTT가 극장을 대체하는 요즘, 굳이 애써 극장을 찾아 꽤 높아진 티켓값을 구매하고 봐도 아깝지 않은 영화다.
관객들은 조춘자가 이리저리 오고 가며 만든 밀수판에 해녀가 입수하듯 첨벙 빠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야기의 매끄럽게 흘러가는 도중에 터질 수밖에 없는 강력한 웃음이 곳곳에 도사리고, 한 수 접어주고 봐야만 했던 여성과 남성의 액션마저 자연스레 설득해 버리고 마는 활극의 요소도 있다. 유독 길고 아픈 독감에 콜록거리고 있는 영화계라 이번 여름 시장도 꽤 불안하지만, 그래도 장점이 그득한 ‘밀수’가 특효약이 돼 위기를 진정시키지 않을까 전망된다.
사진=허정민 기자, NEW
함상범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