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게임, 원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글은 애니큐어에서 발간한 크림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이 글은 미호요(miHoYo)에서 서비스하는 게임 ‘원신’을 플레이하며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글감을 생각하며 어떤 방향으로 다가설지를 고민해봤지만, 게임에 대해 분석하는 것보다는 ‘게임을 하며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보는 것과 듣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게임에 대해 말하는 것과 게임을 하며 생각을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게임을 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원신은 필드를 모험하며 이야기의 큰 줄기를 따라가는 탐험 장르의 게임이며, 이야기의 흥미진진함을 위해 여기엔 ‘세계관(Universe)’이 설정되어 있다. 세계관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근래에 많이들 사용되고 있으므로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게임에서 세계관이라는 말은, 다른 매체와는 달리 플레이어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다. 플레이어가 직접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통해 게임 속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게이머는 자신이 운용하고 조종하는 캐릭터를 통해 가상의 세계인 티바트 대륙을 모험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게이머와 직접적으로 동일시된다. 이는 단순히 보는 것을 통해서만 주인공에 이입하게 되는 영화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바라본 영화 속 세상을 평가하게 되지만,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는 주인공이 되어 겪어본 게임 속 세상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영화와 게임의 차이를 그런 식으로 단정 짓는 건 불분명한 구분일 수도 있다. 게임에서 영화 같은 장면들을 묘사하는 ‘시네마틱’한 영상 삽화들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양쪽 매체는 서로 간에 존재하는 장단점을 적절히 본받는 방식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영화를 플레이할 수도 있고 게임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 안에 들어가 영화 속 세계를 탐험하게 되는 일과, 게임 속 세계를 멀리서 관조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원신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 바로 이러했다. ‘게임을 하며 생각한 것’이라는 말은, “세계를 탐험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세계라는 말을 생각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영화와 게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을 때, ‘탐험’이라 함은 게임 그리고 ‘관조’라 함은 영화를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영화를 뜻하는 ‘관조’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게임을 하며 생각한 것”이라는 이 글의 주제에 어긋나는 건 아니다. 영화와 게임이 서로를 닮아가는 것처럼, 나에게는 게임 세계와 현실 세계가 닮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원신을 하며 생각한 것은 현실을 살아가며 든 생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원신 게임 속의 티바트 대륙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원신을 플레이하는 우리 자신의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이에 파생되는 두 가지 물음이 있다. 첫 번째는 게임을 영화처럼 관조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점, 두 번째는 영화를 게임처럼 플레이하는 게 가능하냐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게임은 플레이어의 직접 조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말하는 관조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대, 게임 속 세계에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주인공이 사실은 조종당하는 게 아니며, 그 스스로 이야기를 살아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관조의 감각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게임 속 세계가 플레이어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라는 점이 인지되어야 한다. 시작과 끝이 명확한 영화 속 이야기처럼, 게임 속 이야기도 시작과 끝이 명확할 때 그 안의 주인공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와 같은 자동적 의식이 생겨날 수 있다. 우리가 조종하지 않더라도 주인공은 게임 속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며 끝내 목표에 도달하게 될 테다. 이제 두 번째 가정으로 넘어가 보자. 영화를 게임처럼 플레이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하나의 영화이며 그 안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라는 말과도 같다. 우리에겐 태어나고 죽는 시작과 끝의 인식이 있으며, 이른바 ‘인생’이라 불리는 삶의 궤도 안에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와 같은 진로 고민을 겪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 같은 게임 속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사실은 조종당하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이야기를 살아가야만 하는 주체이다.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 게임을 살아가고 있다. 이때 나는 좀 전의 문장에서 게임이 아니라 ‘영화’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해두고 싶다. 앞서 말했듯 영화란 시작과 끝이 정해진 세계로 보여지기에, 영화 같은 게임 속 세상이란 시작과 끝이 정해진 세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 또한 그곳에 있음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같은 게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세상이 프레임(스크린 혹은 모니터) 바깥에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장면 이외의 세상이 이 세계에는 존재한다. 처음에 이 게임은 영화 같아 보이므로 보여주는 것 이외의 세상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있으며, 플레이어로서의 우리는 주인공이 되어 나머지 보이지 않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탐사해야만 한다. 우리가 원신을 보며 세계를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삶의 교훈이 되어줄 테다.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이라는 정해진 궤도, 러닝타임을 달려가기만 하는 경주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티바트 대륙에서 주인공은 정해진 거처 없이 대륙의 여러 장소를 자유로이 탐험함으로써 많은 사람과 여러 사건을 겪는다. 이러한 여행은 정해진 길이 없다는 점에서 불안정해보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보물 상자를 열 수 있게 된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세계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모두를 총괄하는 말이다. 이 화려함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따라가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영화처럼 보이는 게임임을 알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그러한 화려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오픈월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정해진 임무를 따라갈 수도 있지만, 필드를 모험하며 자신이 보고 싶은 풍경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주어진 임무를 진행하고 있지 않을 때야 비로소 주인공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그들이 표방하는 영화를 잠시 중단하고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한다. 임무를 수행하는 게 어렵다면 잠시 임무를 미뤄둔 채 필드를 모험하여 자신의 스펙을 올려놓으면 된다. 그래서 이 자유는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궤도가 하나로 고정된 삶에서는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에서의 선택지와도 같아서, 선택의 순간마다 삶의 분기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도달하는 엔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신과 같은 오픈월드 게임에서는 정해진 이야기의 분기점은 있되, 주인공으로 하여금 세계를 자유로이 탐사하게 함으로써 언제 어디서 무엇을 확고히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후퇴가 허용되는 이곳에서 후퇴했을 때, 시간은 정지한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다. 오직 전진만이 있는 세상에서 후퇴는 퇴화를 의미하지만, 필드와 모험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후퇴라는 건 잠시 자리를 뜰 뿐인 것에 불과하다. 즉 이곳에는 언제든지 우리가 돌아올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오직 전진만이 허용되는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되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지만, 게임에서 시간은 무한하다. 물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영화라는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은 분명하게도 유한한 것임이 틀림없고, 이를 알지 못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무한한 시간의 함정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시간이 정지한다는 표현은 시간이 정지되었던 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는 것일 뿐,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마냥 삶을 게임처럼만 여길 수는 없는데, 삶을 게임으로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광활한 세계 안에서 길을 잃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거운 현실에서 잠시 도피할 요령으로 게임을 즐기기에, 게임 속 세계는 현실보다 가벼운 곳으로 여기게 되지만 이러한 판단이 ‘게임으로서 현실을 생각함’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정해진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런 목표 없이 삶을 산다는 건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무한 안에서 정신을 잃고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오픈월드 게임이라 해도 게임이 진행되려면 주요 임무를 완수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게임 활동에 제약이 오는 순간이 온다. 그러니 삶을 살아가면서는 언젠가 이 자리에 돌아와야 한다는 인식을 어느 정도는 새겨두어야 한다. 이곳에서 시작해 이곳을 끝으로 삼아야 한다. 끝나지 않는 여행이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과거와 단절될 틈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의 우리는 더는 성인이 될 수 없을 테고, 어쩌면 슬픈 기억이나 기쁜 기억과의 이별 없이도 계속해서 그런 생각 안에 갇혀있게 될 수도 있을 테다. 이것이 바로 무한이라는 말의 나쁜 사례인 영원이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기쁜 일이 있다면 슬픈 일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끝들을 마주함으로써 내적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끝들이 정말로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영화가 줄곧 반복되어야만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더라도 이별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 사이에 있었던 모험의 경험은 결코 헛된 경험이 아니다. 예컨대 이 시간은 죽은 시간이거나 정지된 시간이 아니며 이것들 모두가 삶의 귀중한 경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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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이라 불리는 현장을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는 개의치 말고, 작은 발걸음으로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필드를 모험한다는 것에는 그러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 내가 서술할 내용은 “영화 밖에도 세상은 있다”고 말했던 것, 즉 게임의 의식과 관계있다. 앞서 말해두었듯이 영화를 게임처럼 플레이한다는 건, 이곳이 시작과 끝으로 정해진 무한한 반복의 세계인 것만은 아님을 명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와 정반대의 경우인 “게임을 영화처럼 관람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는 통제되지 않는 자유를 바라만 보는 것이므로 멈출 수 없는 세계, 이를테면 멸망가도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후자를 다룰 생각이 없다. 단순히 말해 그것은 너무나도 비관적이다. 어떻게 하든 세계는 멸망할 것이며 그 누구도 흐름에 거역할 수는 없다는 상상 말이다. 이러한 상상에서 플레이어는 자유로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게임 개발사가 설계한 선택지 안에서 놀아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은 모두 죽는데 지금을 즐긴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식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이제 더 이상의 시간은 없다”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게임을 한다는 건 그저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 되어버린다.
만약 우리의 삶에 세계의 규칙을 추동하는 신이 있다면, 우리는 신이 부여한 삶의 공간만을 점유할 뿐 시간까지 획득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는 일종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멈출 수 있는 세계는 어떨까. 영화 같은 게임을 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면, 그건 ‘밖에서는 흘러가지만 안에서는 멈춘 듯한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던가. 이 공식은 라이덴 쇼군의 이나즈마에도 적용된다. 이나즈마에 내려진 쇄국령은 그들의 시간을 안쪽으로 제약한다. 그와 동시에 이 안쪽에서는 쇼군이 추구하는 [영원]의 개념이 발동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순간을 사는 존재이며, 우주 전체의 시간으로 보면 한 번의 반짝임에 지나지 않는 별자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칼을 한번 휘두르는 생기는 찰나의 움직임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주 전체로 볼 때, 인간의 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자그마함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칼은 시간을 가르지 못한다. 말하자면 시간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흘러왔던 곳에서 흘러가야 할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만 갈 뿐이다. 즉 시간은 가를 수 없고 그러니 멈출 수도 없다. 우리는 여기서 칼이 가르지 못하는 시간이 바로 우리 자신이 지닌 고유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이 아니라 ‘영화 같은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시간’이다. 멈출 수 없는 세계란 우리 자신의 이어지는 삶인 것이다.
정해진 삶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계의 시간은 프레임 안으로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게 운명에 순순히 따르는 일이라면, 주어진 삶을 산다는 건 자신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면밀히 주도해가는 능동성의 양태를 뜻한다. 이른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면밀히 살펴나가는 게 바로 이들의 모습이다. 이들에게 시간은 칼로 가를 수 없는 것인데, 말하자면 딱 잘라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삶의 어느 시점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등의 시간 의식이 이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시간의 바깥을 탐험하는 이들에게는 프레임처럼 세상을 나누는 칼이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자신들이 소속된 삶이나 사회가 부여하는 시간의 바깥이다. 예를 들어 원신의 주인공 캐릭터가 오프닝 튜토리얼에서 시간의 바깥으로 밀려나 티바트 대륙의 규칙에 지배되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라이덴 쇼군이 말하듯이, 주인공은 티바트의 규칙 바깥에 있는 존재이므로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다. 왜냐하면 수여자의 욕망을 대변하는 게 바로 신의 눈인데 그/녀는 그것 없이도 원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욕망이 겉으로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는 증표가 없으며, 이는 그/녀가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쇼군의 [영원]에 위협이 된다.
쇼군의 [영원]이 추구하는 목표란 사람들의 시간을 영화 안으로 가두는 것, 즉 그들의 욕망이 거세된 채 모든 것이 영화 안에서만 벌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화 같은 삶이란 화려한 외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정해진 순리만을 따르는 인간상을 뜻한다. 따라서 신의 눈 수여자가 쇼군의 [영원]에 위협이 된다면, 그 이유는 그들의 강렬한 욕망이 삶의 궤도를 이탈하게끔 한다는 점에 있다. 강렬한 욕망은 사회가 요구하는 시간을 나누는 칼에 그들 자신의 시간이 베이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예컨대 이들의 시간은 욕망에 의해 보호되며, 이때 사회는 그들의 욕망을 자신들의 영원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는 이들의 욕망을 필사적으로 제거하려 든다. 이러한 점은 플레이어가 이나즈마 지역에 입성한 후 마주하는 몇몇 안수령의 피해자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시간과의 연결고리가 끊기자, 그들과 세상을 이어주던 욕망 또한 사라짐으로써 이들은 시간의 바깥 지대에 내쳐져 버린다. 이렇게 끈 하나에 기대어 수행하던 탐사행위가 길을 잃고 나면, 이들에겐 망각이나 광증과 같은 증세가 찾아온다. 이는 욕망에 의해 가능했던 시간의 바깥을 탐험하던 행위에서 그러한 욕망이 사라질 경우, 이들은 시간의 바깥에 좌초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들은 시작에서 끝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제 이들에겐 정말로 시간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쇼군은 이렇게 사라져버린 시간이 바로 영원의 한 사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쇼군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형태로 발현된 신의 눈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예외적 시간으로 그들을 이끈다는 점을 깨달았고, 이에 따라 영원, 혹은 영화를 유지할 요령으로 안수령을 내렸다. 이렇게 이나즈마에는 쇼군이 표방하던 영화의 화려한 외양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시간의 바깥을 탐험해오던 주인공이 발견되었을 때, 쇼군은 그가 영화 같은 게임의 플레이어임을 깨달았을 테다. 자신이 신으로 군림하는 이나즈마에서 시간의 시작과 끝은 자신으로 귀결되어야만 하는데, 그 시간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존재를 그녀는 발견해버렸고 이는 [영원] 체제의 중대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나즈마 이야기의 바로 전 마신 임무에서 바위의 신이자 계약의 신인 모락스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마모되지 않는 것이란 없으며 영원해 보이는 바위조차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모락스의 이 말은 쇼군의 행동에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하는바, 모락스와 라이덴 쇼군 사이에는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도출된다. 모락스가 자신의 하늘을 인간들의 별자리에 개방한 반면, 라이덴 쇼군은 자신의 하늘에 빛나는 별은 오직 자신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락스는 “바위도 닳는다.”고 말하면서 찰나의 개념 안에 자신을 대입시켰지만, 라이덴 쇼군은 “하늘의 이치만이 영원에 가장 가깝다.”고 말하면서 최대한 하늘에 가까워지려 했다.
그런데 사실, 티바트 대륙에서는 하늘조차 영원하지 않다. 이곳에서 영원은 깨어져야 할 가치이며 주인공의 목표 또한 그러하다. 원신의 오프닝 튜토리얼에서 등장하는 천리의 주관자를 떠올려보자. 천리(天理)라는 이름의 뜻이 다름 아닌 ‘하늘의 이치’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오래전 중국에서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를 천자(天子)라 불렀는데,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던 황제에게 하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이란 곧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농사일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 절기 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하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은 곧 자신의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에 대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면, 티바트 대륙을 모험하는 주인공은 가히, 하늘의 운명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 별자리라 할 수 있을 테다. 원신의 튜토리얼은 주인공이 천리의 주관자에 대항하다 정신을 잃는 것으로 시작한다. 별자리는 늘 순환하므로 절기에 따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종류가 다른데, 주인공은 그러한 절기의 바깥에 있으므로 별자리의 운행에 영향받지 않으며, 따라서 하늘을 지배하는 황제(천리의 주관자)로서는 그를 처단해야 할 필요가 분명했을 것이다. 하늘의 운행을 기록한 천체운행도의 바깥에 자리한다는 건 황제의 영원을 벗어남을 의미하니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가두어두려는 옛 중국의 황제와 이나즈마의 라이덴 쇼군 간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옛 진나라의 시황제가 영원한 나라를 꿈꾸며 불로초를 탐냈듯이, 영원이라는 것은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지녀야 할 기본 소양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황제들은 변화를 두려워했으며 오직 자신이 허용하는 수준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던 하나의 사실은 하늘의 움직임과 별자리는 바라보는 이들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모양새의 구름을 마주하는 것처럼, 하늘의 움직임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북반구가 낮이면 남반구는 밤이라는 자명한 사실은 우리가 단 하나의 하늘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쉽게 간과되곤 한다. 쇼군의 [영원]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늘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어쩌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하늘을 게임은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하늘을 고정 시점으로 올려다보는 반면, 원신이라는 오픈월드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탐험의 일부로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즉 영화는 이곳이 영원하다고 느끼게끔 하지만 게임은 이곳이 영원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이따금 영화는 영원불멸한 시간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언젠가 끝나야만 할 시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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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즈마 이야기의 마지막 장, 주인공이 천수각 문을 막 나설 때 라이덴 쇼군은 뒤를 기습해온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대문 밖에 있던 반란군들이 놀란 눈을 하는데, 그중 바람 신의 눈 소유자인 카즈하에게 또 하나의 바람(Wish)이 찾아온다. 죽은 친구의 소원을 대신 이루어주겠다는 바람, 언젠가 쇼군의 폭정을 멈출 이가 무상의 일태도를 막아 세울 것이라는 친구의 말이 화면에 오버렙된다. “어떤 염원은 육체와 영혼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눈에 번개의 생기가 돌아오고, 카즈하는 친구의 바람과 자신의 바람을 합쳐 일태도를 막아낸다. 이나즈마 스토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장면은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첫 번째는 영원을 추구하는 신이 영원하지 못한 인간에게 반박당했다는 점이다. 이 장면에서 무상의 일태도를 물리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인간의 시간이 신의 시간에 다가서게 되었다는 점, 즉 쇼군이 추구하던 영원의 개념이 그리 굳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뜻한다. 그녀가 말하는 [영원]이란 쇼군의 능력으로만 이루어낼 수 있는 업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이기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기에 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쇼군과의 싸움에서 권속 야에 미코가 개입하여 흐름이 바뀌는 2페이즈의 컷신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안수령으로 신의 눈을 빼앗긴 사람들의 염원이 주인공에게 힘이 되어주는 장면 말이다.
이나즈마 이야기의 중간에서 벌어졌던 쇼군과의 1차전에서 주인공은 패배한다. 이후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벌어지는 2차전은 야에 미코의 개입으로 인해 2페이즈로 넘어간다. 이때 게임 음악은 이나즈마 필드 전역에서 재생되었던 필드 음악을 샘플링하여 섞은 버전이 흘러나온다. 이는 이나즈마 전역을 돌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던 게임 밖의 플레이어에게, 이 모든 일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안수령의 피해자를 보며 이나즈마에 입성했던 주인공이지만, 이 안수령에서 사라지는 건 단지 신의 눈을 소유했던 이들만의 염원이 아니었다. 이나즈마 이야기의 핵심은 모든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염원이 있고, 신의 눈은 그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신의 눈은 염원의 강한 형태일 뿐이지 오직 선택받은 이만이 꿈을 꿀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아마도 텟페이의 죽음은 그러한 이유로 이야기 중간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텟페이는 주인공을 동경하여 사안을 무리하게 사용하다 죽는다. 이때 사안이 신의 눈을 모방해 만든 도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원신에서 신의 눈은 모든 사람은 신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사안이 마신의 잔재로 만든 것이고 마신은 일곱 주신이 되지 못한 신격 존재라는 점에서, 사안은 신이 되지 못한 이들의 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텟페이가 사안을 무리하게 사용하다 죽은 건 다음과 같은 하나의 사실을 말해준다. 코코미가 이끄는 반란군 부대는 안수령에 들고 일어났고, 또 실제로 반란군 부대에는 어떤 형태로든 안수령과 연결된 이들이 병사로 입대했다. 신의 눈을 뺏긴 이들도 있지만, 신의 눈을 뺏긴 지인이 폐인이 된 것을 보고 복수심에 불타오른 이들도 있었다. 이때 병사들의 반응은 두 개로 갈린다. 신의 눈이 있었다면 더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쪽, 신의 눈 없이도 자신의 염원은 꺾이지 않는다는 쪽이다. 이들의 반응은 신의 눈 자체가 어떤 염원 덩어리라기보다는, 그들의 염원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매개하는 게 신의 눈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다음처럼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거기에 꼭 증표 같은 게 필요한지를 말이다. 텟페이가 정말로 이루고 싶었던 건, 신의 눈을 갖는 게 아니라 전장에서 멋지게 활약하는 것이었다. 텟페이에게 신의 눈이란, 주인공처럼 전장에서 멋지게 활약할 수 있게 해줄 도구에 불과했을 뿐이었던 셈이다. 이는 주인공이 신의 눈 없이도 힘을 사용한다는 점을 텟페이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추론이다. 신의 눈 없이도 강한 여행자를 동경한다는 건, 신의 눈이 아니라 강한 힘을 동경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자면, 자격이라는 말보다는 조건이라는 말이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해보인다. 먼저 이 두 개의 말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다른 뉘앙스로 들린다. 자격이라는 말이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조건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처럼 보인다. 잘 먹고, 잘 잘 수 있는 것과 같은 문제가 바로 인간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인간의 자격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자격이 없으면 사회에서 배제되지만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삶 자체에서 배제된다. 이 염원-텟페이에게 강한 힘에 대한 동경이 바로 그러했다. 텟페이에게 힘이란 자격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텟페이는 누군가를 지킬 힘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안수령이 추구했던 [영원]의 모습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최저를 달성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염원이 없는 삶은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른바 모든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전 사회의 궤도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게 바로 염원의 거세를 통해 만들어진 영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수령의 기본 전제를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안수령은 인간의 조건을 표면으로 드러내기 위해 설계된 서사적 장치이다.
필드를 탐험하는 게임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곧 우리의 꿈이 된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꿈이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자체로 넘쳐나는 꿈 덩어리이고, 영화를 보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능력 또한 그러한 꿈속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를 마땅히 구분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현대의 인간들은 차이가 최소화된 표준적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전체화되고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하나의 염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녀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이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바꾸어 말해 이는 신의 눈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쇼군이 만들고자 하는 영원이 인간 개인의 차이를 최소화함으로써 가능하다면, 여기서 안수령은 그러한 염원의 거세로 이해된다. 반면 쇼군의 [영원]이 인간의 염원을 영속화하는 것이라면, 이때 안수령은 모두의 염원을 단 하나의 미래로 고정시키는 일을 의미한다. 이 둘은 각각 꿈이 없는 세계, 꿈이 넘쳐나는 세계이며, 전자가 게임이라면 후자는 영화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다. 신의 눈을 염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으로 이해한 이들에게, 그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의 눈을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한 이들에게, 그것은 삶의 기본 원리이다.
천수각 입구에서 카에데하라 카즈하가 보여주었듯이, 사람들의 염원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 주체가 죽었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카즈하가 신의 눈 없이도 원소의 힘을 쓰는 여행자를 보며 깨달은 교훈이다. 인간의 염원은 그녀의 허락 없이도 일심정토에 개입한다. 즉 인간의 염원은 쇼군이 허가하거나 불허할 수 있는 통제 범위 안에 자리해있지 않으며, 이는 인간의 염원이 쇼군의 염원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니 어쩌면, 모락스처럼 인간에게 일을 수행할 권한을 넘겨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신이 영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러한 영원에서 먼저 발을 빼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쇼군이 추구하는 영원이 결코 완벽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나즈마 이야기의 여담으로 남겨진 라이덴 쇼군 전설 임무에서, 그녀도 이 부분을 지적한다. 오히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하지 않은 영원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이다. 라이덴 쇼군, 아니 에이가 안수령을 통해 얻은 교훈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을 테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안정하기에 그들의 염원을 믿을 수 없다면, [영원]을 숭배하는 그녀의 주장은 모순덩어리가 된다. 인간을 위한 신이라는 그녀 자신의 말은, 불안정한 영원-그런 인간들을 수호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안수령이 사람들에게 남긴 건, 아이러니하게도 영원이라는 말 자체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물론 안수령이 이나즈마 전역에 영원을 존속시킨다는 목표로부터 시작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니라 게임의 관점에서 이 영원은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다. 우리가 잠시 게임을 쉬었다가 돌아와도 게임 속 세상에는 어떠한 변함도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참여하지 않아도 게임은 영원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현실과 적절히 타협할 수 있다. 영원히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현실이란 도리어 꿈꾸지 않는 공간, 즉 희망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이들에게 게임이란 정해진 삶의 궤도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티바트 대륙의 바깥에서 포섭된 주인공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이 게임을 잠시 방문해온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은 강요되지 않는다. 영화적 경험에서 시간의 흐름이 그 배경에서 고정되어 있는 반면, 게임의 경험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플레이어가 탐험을 수행하는 바로 그 흐름 안에 있다. 이처럼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살아가기보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를 택해야만 한다.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느낀다면, 그 시간이 갑자기 끝나버렸을 때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을 잠시 방문했다고 여긴다면, 흘러가는 시간에 깊이 고민할 필요 없이 자신의 염원에 충실할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