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 : 블루 아카이브로 보는 복음과 은혜의 이야기

스포일러 주의

이 글은 블루 아카이브 1부 최종장의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스토리를 감상한 이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 소녀는 방금 전까지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에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소녀는 당신을 향해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합니다.

소녀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어떠면 그 능력으로 이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과연 당신은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요?

있다면, 그 믿음의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3-44

이 말씀은 예수의 대표적인 가르침인

'산위의 설교'에서 나옵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가진 독특성 중의 하나는

바로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많이 들어본 말이기에

특별히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죽일 듯이 미운 사람. 한 명쯤은 있을 겁니다.

나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사람...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배신했던 사람...

"용서해야 한다."

참 좋은 말인 것은 압니다.

용서가 좋은 가치라고 대충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 생각나는 그 사람을,

당신은 용서할 수 있으신가요?

그런데, 예수는 용서를 넘어서

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대체 왜요?

그리고 대체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죠?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5하반, 48

예수는 그 이유를,

'신'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자신들도 행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위선자"

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마태복음 23:3-4)

그렇다면, 예수의 그 가르침.

당연히 예수도 그대로 행하여야 할 것이고,

동시에 그를 보낸 이.

'신'도 원수를 사랑하는 존재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하네요.

우리들의 인상으로 '신'은 참 괴팍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헌금 바치고, 기도 열심히 해도 복을 줄까 말까 하고,

뭐 우리를 사랑한다고 교회에서 나눠주는 티슈곽에 보면 쓰여있기는 한데요.

자신을 안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보낸다고 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쪼잔하고, 무서운 존재 아니었나요?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은 원수도 사랑한다."

와 정말요?

일단 '신'의 이야기는 뒤로 제쳐두더라도,

적어도 예수는 그대로 실천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께 데리고 옵니다.

유대교의 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 누군가가 바람피웠다는 이야기가 올라오면

분노하며 죽일 듯이 욕합니다.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죠.

그녀는 처벌받아야 마땅했던 존재였습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을 상처 입힌 명백한 악인이었죠.

그런데, 예수는 그녀를 명백한 악인으로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녀에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 평론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그녀를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이미 재단했고,

돌을 들고 그 악을 처단하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예수는 지혜로운 한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7중반

이제, 그들의 판결의 대상은 간음한 여인이 아닌 자신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복잡하게 나쁜 사람'인 스스로의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하나둘씩 손에 쥔 돌을 버려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 또한 그녀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합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는 항상 그랬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음란한 여인에게도,

매국노이자 부패한 공무원인 삭개오Zacchaeus에게도,

십자가 옆에 매달렸던 강도에게도,

어떻게 봐도 너무나 명백한 악인들인데,

예수는 너무나 흔쾌히 그들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마도 그들 안에 있는

어떤 '선한 가치'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혹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삶을 내가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죠.

좋은 환경에서 기쁜 일만 가득한데 화를 내는 이상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는, 다 낼 만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유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던져지곤 합니다.

사실, 세상은 완전히 어질러져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들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

서로의 욕심이 첨예하게 줄다리기를 하며 균형이 맞추어진 세상

그래서 그 세상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악한 행동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더 많이 취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속이고, 상처 입혀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져 있습니다.

그 어질러진 세상에 예수는 힘써 저항합니다.

그는 욕망으로 망가진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을 외치며,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망가진 세상에

망가진 사람들에 의해 억울하게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게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에게도

끝까지 그는 용서를 베풀었고, 또 사랑했습니다.

예수는 끝까지,

타인인에게 있는 '선한 가치'를 믿었던 것입니다.

설령 그가 악인이며, 원수라 할지라도요.

그렇게 끝까지 '사랑'의 가치를 붙들고

바보처럼 살다가 죽은 남자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신이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적이라고 하면 무언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일을 생각합니다.

병이 고쳐진다던가, 미래를 예언한다던가 하는 일이죠.

기독교에서의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방금 이야기 한 '부활'일 것입니다.

부활은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현대의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을 것 같지만

그런데 생각보다 기독교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서 실천 가능한 현실적인 교훈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면,

그 사람이 살아나지만, 당신은 죽게 되겠죠.

그런데 죽을 것처럼 보여도, 죽지 않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 최고의 절망도,

생명을 주는 사랑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기적은 '사랑'입니다.

나도 살리고, 너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기적이죠.

예수는 그렇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그를 다시 살림으로써, 그가 옳음을 나타냈습니다.

"참 사랑은 죽음마저도 이깁니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으로 '신'의 참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실로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는 신이 원수도 사랑하는 존재라 가르쳤으니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신'은 정말 자신이 그런 존재였음을 알려준 것입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모습에 비추어 '신'을 오해했습니다.

변덕스러워서 도저히 그 본성을 알 수 없는 '신'...

피를 바쳐서 예배해야만 그 진노를 감해주는 '신'...

부르짖고 기도해야만 인간의 문제에 개입하는 '신'...

사람의 눈에는 '신'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은 자기 멋대로 '신의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의 모습'이 우리에게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사랑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신'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12,16하반

그리고 '신'이 예수를 보냄으로 인해,

그가 또한 이 망가진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탐욕을 부려 세상을 망친 것은 인간이었지만,

'신'은 그 책임을 자신이 지고

자신이 직접 망가진 세상을 고쳐나갈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당신을 구원해낼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자신의 사랑을 알려주고,

그의 사랑으로 세상을 다시 고쳐나갈 것을..

우리는 연약해서 항상 실수합니다.

그 실수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의 실수로 인해서 관계가 파괴되고,

사람들이 상처 입었습니다.

나 또한... 나의 실수로 망가졌습니다.

세상의 문제는 내 앞에 너무나 버거워서

도저히 풀어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신'은 예수의 삶을 빌어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 실수가 아니야."

"그 책임은... 이 세상에 책임이 있는 내가 지겠다."

'신'의 본성을 몰랐던 인간은 '신'을 원수처럼 생각했습니다.

그가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신'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지 않았고,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등을 돌리고 원수가 된 인간에게

'신'은 자신의 아들을 화해하기 위해 내려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나서야

비로소 그 모든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원수도 사랑한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도 사랑한다는 것을요...

그 깨달음을 기독교에서는 '기쁜 소식',

바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그는 원수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원수에게 귀를 기울였고,

그는 원수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도 가르치십니다.

너희도 동일하게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그런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고,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노력과 자기 수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의외로 한 가지 사실만 깊게 깨닫는 것으로도 가능하게 됩니다.

내가 미워하던 그 원수도,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가치 있는 존재이며,

여전히 '신'이 그 안에 있는 선한 가치를 믿고,

소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

즉, '신'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거나,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은 우리를 이미 사랑했고, 용서했습니다.

그저 우리가 먼저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으니,

그리고 타인 또한 그렇게 사랑받는 존재이니,

당연히 나 또한 타인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방법이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굉장히 짧은 두 글자로 요약합니다.

'은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그야말로 '사이다'의 시대입니다.

미디어에는 복수물이 난무하고,

죄지은 자들은 지은 죄보다도 더 처벌을 받아야 속이 시원합니다.

혐오의 시대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를 무턱대고 까내려야 합니다.

그들은 멍청하고, 아무런 생각이 없고, 태생부터 악해서

말해도 이해도 못 하니 그저 조롱하고 조리돌림 하는 것이 능사입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바보 천치입니다.

나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은 그저 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실수를 한번 하면 우리는 신이 납니다.

그 실수를 꼬투리의 꼬투리까지 잡아서 끝까지 조리돌림하고,

과거에 했던 모든 말실수를 끄집어내서 효수하고,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장대에 매달아 구경거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함께 손에 돌을 들고 한 번씩 던집니다.

재밌으니까, 한 번 더 던집니다.

그런데,

돌을 들고 마음껏 던지려는 우리에게.

타인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단순한 악한 자로 재단하는 우리에게.

'신'은, 동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의 손을 잡아 주어라.

내가 여전히 그를 믿고 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라.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그를 믿고 있으니,

너 또한 그를 한번 믿어주지 않겠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사도행전 10:15중반

그 말씀을 들은 우리가

먼저 서로를 믿어줄 때,

서로 사랑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부탁을 받은 또 다른 소녀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간단히, 소녀는 그 손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어찌 보면 빈약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간결하고, 또 명확했습니다.

"선생님이 당신을 믿었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타인 안에 있는 선함의 가능성을 믿고,

그가 내민 손을 함께 잡아보시겠습니까?

-그 또한 사랑받는 자이기에-

기적은 멀리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

당신이 그 손을 잡아주는 곳.

그래서, 사랑으로 누군가가 살아나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