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행자 챌린지_2X Mission

© scorpkris, 출처 Unsplash

Mission.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기자신의 성장과정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정리해보자.

가난 속에서 태어난 아이어른

전기료를 내지못해 어두컴컴하고 추운 방 안에서 동생들을 껴안고 엄마를 기다리는 밤 8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첫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나도 어린 두 동생들을 챙기느라 무서워할 겨룰이 없었다. 두꺼운 이불안에서 동생들을 부둥켜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비로소 엄마가 오고나서야 슈퍼에서 초를 사와 밝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전학만 5번을 다녔다.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만 하는 것은 학창시절을 순탄하게 보내기 위한 생존방식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간 학교는 이미 친한친구들이 다 무리지어 있어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할까'. '내가 학교생활에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될까'

속으로는 안절부절하지 못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다.

'제발...제발 한명만 나한테 말걸어줬으면 좋겠다'

"진희야, 우리집 가서 놀래?" 키가 작고 귀엽게 생긴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것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괴롭힘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나에게도 친구가 생겨 너무 기뻤다. 하지만 점점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잡아서 협박이 시작되고 돈을 가져오라고 하고, 우리집에 와서 하루종일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나를 종부리듯이 부렸다.

왜 나보다 훨씬 작은 친구 한명에게 괴롭힘을 당했냐고? 그건 모르겠다. 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냐고? 맞벌이하시느라 저녁넘어서 들어오시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릴수는 없었다.

'그래도 친구니까,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는 엄마,아빠 없이 외할머니와 외삼촌댁에서 지내는 친구였는데 어느 날은 몸에 멍이 잔뜩 들어서 왔다.

그 친구도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친구를 한편으론 불쌍하게 여기면서 이 상황을 말도 안되는 합리화를 시켜왔다. '그래, 이친구도 힘들어서 짜증을 부리는거겠지 나아지겠지...'

그렇게 지낸지 1년이 다되어갔을때 그 친구는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다며 멀리 전학을 갔다. 나는 그순간 참 행복했다.

엄마와 아빠에게 말하지않고 끔찍했던 순간이 끝나서 안심했다.

어른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맞벌이하시면서 힘든 모습을 보고 걱정하시지 않게 하고 싶어서 혼자서 모든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다. 해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끔찍했던 그 시간들이 끝이 났다.

가난은 너무 잔인한 것이다. 분명 잘못한게 없는데 자존감이 낮고 남들앞에서 항상 주눅이 들었다. 그와중에 힘들게 맞벌이하고있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않아서 아이어른이 되어버렸다.

자의식 과잉인 K-장녀

"우리 진희가 전교 1등이라고? 진희야, 너가 우리집의 희망이다"

중학교 1학년 기말고사에서 전과목에서 1개만 틀리고 전교 1등을 찍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몇백명 있는 학교에서 1등한건데 스스로 뿌듯하기보다는 부모님께 좋은 소식을 알릴 수 있음에 기뻤다.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열심히 공부하는 것 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빠듯했던 살림살이에 보습학원 1개는 보내주셨다. 자식은 가난한 삶을 살지않도록 부모님은 매일을 고군분투하셨다.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엄청난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도 무조건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돼'

강박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왔고, 이해하면서 공부한게 아니라 달달달 외우면서 공부한 전형적인 K교육의 피해자였다.

학교성적은 잘 나오다보니 아빠는 서울대에 진학해서 외할머니댁에서 살면 되겠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서울대? 내가 서울대를 어떻게가', '내가 교사를 어떻게 해, 그건 다른 사교육 많이 받는 친구들이나 가는거겠지..'

자의식이 넘쳐나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사춘기였다. 목표, 꿈도 없이 나에게 주어진 학교 시험만 열심히 공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안했다. 학교내신은 점수가 잘 나오는데, 모의고사는 4등급이었다.

'내가 인서울 대학교를 어떻게가..사립대학교를 가도 그많은 등록금을 어떻게 내...'라며 자위했다. 속으로는 너무 가고싶었지만 갈 수 없을것같아 자위하며 대학교 하향지원을 했다. 그렇게 경기도외곽 국립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갑자기 수학과냐고? 이과여서 수학, 과학은 높은 점수를 보였다. 고3 시절 도대체 내가 뭘하고싶은지 모르겠어서 그 당시 통계과목이 재밌어서 통계학과, 수학과를 지원했지만 통계학과는 불합격하고 수학과에 들어갔다.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수학이론을 공부하고 증명과정을 잘 외워서 4.2라는 등급으로 졸업했지만 지금 나에게 기억나는 수학이라곤 오일러의 법칙?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 생활 내내 성적은 잘 나왔지만 도대체 뭐가 하고 싶은건지 몰라서 답답했다. 성적을 잘 받기위해 공부하고, 대외활동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다. '도대체 풀리지않는 이 욕구는 뭘까'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이별 뒤 땅은 굳는다.

"왜 그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으면서 열심히 살아, 난 이해가 안돼"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취준시절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 남자친구와 그렇게 이별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새내기 시절 인생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매일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강박과 불안한 상태인 나와 다르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가 좋았다. 남자친구는 나보다 4살 많은 연상으로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그가 좋았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서울 맛집을 데려가주고 이곳저곳 여행도 많이 다녔다.

불안정한 상태인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주고 자유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 그에게 참 고마웠다. 그렇게 대학시절 4년이 끝났다. 어느날 그는 말했다. "진희야, 나중에 세계일주하면서 너랑 살고 싶어"

그 말을 듣고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돈 많이 벌면서 한국에서 살고 싶은데 이 오빠가 생각하는 미래는 내가 생각하는 미래랑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다. 현실적인 내가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 오빠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오래만난 정으로 연애를 계속했다. 자존감이 가장 낮은 취준시절 토스 공부하면서 면접준비 등으로 고민을 이야기했다. 취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열심히냐고" 아둥바둥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나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서로 자존심이 상해 이별했다.

비로소 찾은 해답

대학생활 내내 함께 했던 사람이라 이별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본 이별로 마음이 공허했다. 한달동안 술먹고 욕했다가 울고불고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괜찮아졌다. 남자친구로 채워졌다가 비워진 공간을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며 채우기로 결심했다. 혼자서 등산을 했다. 산을 오를때 숨이 가파오르고 땀흘리며 도착한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속에 있던 불안감을 자존감으로 바꿔주었다.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현실에서 해방시켜주었다. 그 다음으로 우연히 책 한권을 읽었다.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갈때 뒤돌아보지 않는다.' 라는 책을 읽고 내 인생은 점차 변해갔다. 다른 사람이 보면 따뜻한 에세이 한 권이겠지만 공허한 마음을 한순간에 꽉 채워준 인생책이었다. 그 이후로 책은 내 인생의 일부분이되었다. 마음이 힘들 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면 책을 찾아갔다. 독서, 등산,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 마음이 채워지고 자존감은 올라갔다.

자기계발, 재테크, 경제, 뇌과학 책 등을 읽으며 깨달았다. 어렸을때부터 풀리지않던 욕구는 바로 '부'였다. 가난이라는 마음으로부터 탈출시켜줄 돈, 그것은 내 인생에 풀리지않는 문제의 답이었다.

자존감이 높아지고 인생의 방향을 알고나니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확신이 섰다. 더이상 현실을 그만 회피하고 인정하고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젠 '부'에 가까워지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고 실행할 단계이다. 역행자를 재독하면서 깨달았다. 몇개월동안 고민만하고 실행하지않는 지금도 자의식 해체가 필요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