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덕기; 귀칼 입문부터 원신 탈퇴까지

2019년 11월, 수능이 끝났다. 드디어 기숙학원 탈출과 함께 학업이라는 속박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동안 단절되어있었던 친척들과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는 나보다 6살 어린 사촌 남동생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 "형, 요즘 뭐 봐?" 라고 물어봤다. 세상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됐기에 "딱히 보는 거 없어." 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귀멸의 칼날이라는 애니를 안 보면 인생 손해라는 둥, 러브코미디라는 장르가 완전 꿀잼이라는 둥, 불쑥 일본 만화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원피스 이외엔 하등 관심이 없는 나였지만, 못 이기는 척 그 자리에서 귀멸의 칼날을 틀어봤다.

완전 꿀잼이었다. 아니, 놀라웠다. 처음 접했을 땐 작화라는 단어도 잘 몰랐지만, 영혼을 갈아넣은 듯한 작화와 연출에 감탄했다.

그날은 친척집에서 밤을 꼴딱 새우고 맥주까지 마시며 26화에 달하는 시리즈를 정주행해버렸다. 덕분에 면역력이 떨어져서 독감에 걸렸고, 엄마에게도 욕을 많이 먹었다.

독감 기운이 나타날 즈음, 사촌동생이 말했던 러브코미디라는 장르에도 손을 댔다. 보통은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던데, 그쪽 세계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는 모양이다. 처음 접했을 땐 여운이 남을 만큼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증세가 심해져서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유명한 시리즈들을 닥치는대로 찾아서 봤다. 오타쿠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작품들 말이다.

퇴원 이후부터 입대 직전까지 충실하게 오타쿠의 길을 걸었다. 메창 인생과의 시너지로 현실감각이 순식간에 뭉개졌고, 그 상태로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생일날 입대를 하게 되었다.

훈련소에 있을 땐 무뎌진 현실감각 때문에 행동이나 태도에 문제가 많았다. 잘못을 거듭할수록 동료들에게 더 큰 미움을 샀고, 그때마다 많은 반성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자대 배치 후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그 망상스러운 취미부터 끊어내는 게 우선이었는데,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건지 쉽사리 끊을 수는 없었다.

대신에 우회책을 생각해냈다. 만화 말고 일본 드라마나 추리소설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상당히 잘 먹혀드는 전략이었다. 문화 양식이 똑같아서 거부감이 안 들었으니까. 대신에 드라마는 카메라로 찍는 만큼 현실성이 있었고, 추리소설의 스토리 퀄리티는 웬만한 만화보다 훨씬 뛰어났다.

한동안 그런 걸 즐기다가 러브코미디물을 슬쩍 봤더니, 토할 것 같았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본 걸까? 주변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본의 드라마나 소설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의 작품에도 관심이 옮겨갔다. 하지만 일본 만화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진 못했다. 비중이 많이 줄었을 뿐이다. 결국 서브컬쳐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못한 채 전역하고 말았다.

한 학기의 추가 휴학과 성능 좋은 컴퓨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전역 한 달 뒤에 메이플을 끊었다. 그러나 또 한 달이 지나서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가장 친한 선임이 카이스트 공대생이었는데, 그 형이 원신이라는, 심히 오타쿠스러운 게임을 적극 추천하는 것이다. 이유는 당연히 심심하니까, 같이 하고 싶어서.

심심한 건 피차 마찬가지였기에 수긍하고 바로 게임을 깔았다. 3D 게임이라 용량이 엄청났다. 처음엔 흥미를 못 느꼈지만, 이내 군대에서 끊어내지 못한 오타쿠 기질이 발동했다. 덕분에 점차 맛을 들이게 되었고, 얼마 안 가 그 형을 뛰어넘는 폐인으로 전락했다.

폐인이 된 나는 늘 새로운 컨텐츠에 목말라했다. 원신을 구성하는 음악, 스토리, 그래픽, 미술 등 모든 예술적 요소에 열광했다. 게임성이 메이플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게임을 끊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작 비하인드 영상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밀도 높게 5개월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어 semi-고인물이 되었다. 소비할 컨텐츠가 고갈되고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위기상황이었다. 머리가 아주 많이 나빠져 있었다. 개강 후의 수업 내용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로. 메이플을 끊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게임만 삭제하는 건 쉬웠다. 넥슨 계정을 지울 때처럼 큰 맘 먹고 클릭 몇 번만 하면 되니까. 처음만 어렵고 두번째는 쉬운 건 뭔가를 끊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원신 회사는 계정 삭제에 무려 한 달의 유예기간을 준다. 확인 절차 때문이라나 뭐라나. 당연히 핑계다. 지금까지 쏟아부은 열정에 대한 아쉬움을 노려 다시 돌아올 기회를 주는 것일 뿐.

한심하게도 처음 세 번은 삭제에 실패했다. 유혹에 못 이겨 아예 게임을 다시 깔고 3주 동안 열심히 플레이한 적도 있었다. 그러곤 현타가 와서 다시 지워버렸지만.

한 달을 어떻게 참느냐가 관건이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 일주일이 지나면 자꾸 미련이 생긴다. 고심 끝에 마음의 빈자리를 한국 드라마로 채우는 방법을 써봤다. 그것도 굉장히 감동적이고 가슴 먹먹한, 웰메이드 드라마로. 다소 엉뚱한 방법이었지만 제대로 먹혀들었다. 한 달을 끄떡없이 버티는데 성공했으니까.

첫 시도가 3월, 실제로 삭제된 게 무려 11월이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탈메 22개월, 탈원신 7개월 차다. 원신을 끊은 후에도 관심사를 끊임없이 갈아끼우려고 했다. 덕분에 서브컬쳐 전반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다. 지금은 새로운 작품에 발을 들이진 않고, 기존에 보던 것들 중 일부만 이어서 보는 중이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회차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찾아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만 일본식 서브컬쳐가 무조건 정신건강에 해로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사회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였다. 현실의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며 살고 있지 않을 때, 그런 비현실적인 컨텐츠들을 접하곤 했다.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했다면 그냥 가벼운 취미로 즐길 수 있었겠지만, 그러질 못했다.

올바른 가치관과 뛰어난 안목을 갖추기 전까지는 내려놓고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언젠가 견문이 넓어지면 그런 2차원 작품에서도 뭔가 보이는게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