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7. 블루 아카이브 최종편 소감
이번에 새로 생긴 콘텐츠 제약해제결전이 최종편 4장 12화까지의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길래 짬을 내서 쭉 달렸다.
최종편의 끝까지 가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카르바노그의 토끼편은 대책위원회나 파반느편보다도 아래라는 말을 익히 들어서 기대치를 낮췄음에도 그 이하의 퀄리티로 실망을 안겨줬고, 이후 에덴조약편에 비견된다는 최종편에 입장하고 나서도 최종편 3장까지는 스토리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다. 분명 재미있고 잘 만들기는 했지만 몰입까지는 되지 않는, 잘 만들었거나 말거나 나랑은 별 상관 없는, 딱 그 정도 스토리.
이런 감상이 나온 가장 큰 이유는 <블루 아카이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인 "어른의 의무, 선생의 책임"에 내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중 '나'이자 주인공인 "샬레의 선생님"은 어른이자 선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학생들의 문제에 발 벗고 나선다. 어른이자 선생이기에 학생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며, 어른이자 선생이기에 학생들이 뜻하는 바를 이루게끔 도와줘야 하고, 어른이자 선생이기에 배신당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무조건 학생을 신뢰해야 하며, 어른이자 선생이기에 실제로 배신을 당하더라도 배신한 학생을 용서해 줘야 한다. 학생이 잘못을 저지르면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학생이 위험에 처하면 대신 희생해야 한다. 가끔씩은 현재의 생활이나 생명까지 걸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어른이자 선생이니까.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 잘못이 아닌데도 책임을 지고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동의하지 않는 걸 넘어 그 주장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게임 속 샬레의 선생님은 나이고, 선생님, 즉 '나'는 나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당연하다는 듯이 한다. 그리고 게임은 스토리를 통해 그 행동이 옳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이 은근슬쩍 강요한다. 선생님의 모티프를 예수에서 가져왔다고 시청자들이 이야기하던데, 나도 그렇게 느꼈다. 예수가 아닌 나에게 예수가 되라,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여기에 현실 인식 없이 이상론만 내세우는 캐릭터를 극혐하는 성향까지 맞물리는 바람에, 최종편 3장을 진행할 때쯤에는 선생님이 어른의 의무나 그 비슷한 대사를 칠 때면 "또른의 또무, 또생의 또임 작작 좀 해라"고 대놓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이랬던 감상은 4장에서 180도 뒤집혔다. 현실 인식이 있든 없든, 이 정도까지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추구할 수 있다면 그건 허울뿐인 이상론자가 아니다. 대책위원회편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계속 나온 어른의 의무와 선생의 책임은, 학생들을 잘 부탁한다는 한 문장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추구와 각오와 의지를 보여줬기에,
그리고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
기적은 기적적이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다. 무책임한 이상론이 아니었고,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억지로 일으킨 기적이 아니었다. 마지막 4장의 전개와 결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율이었고 감동이었다. 나는 에덴조약편보다 이 최종편이 더 완성도가 높으며, <블루 아카이브>의 스토리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방금 막 스토리를 다 보고 방송을 끝낸 지금, 이토록 아름다운 청춘과 학원의 이야기를 읽었음에 가슴이 벅차다.
최종장을 다 보면 나오는 카드 아이템이 있다고 한다. 사용하면 유료 재화인 청휘석을 얻을 수 있지만 카드는 사라진다는데, 다른 사람이 쓰던 계정을 받은 나는 이미 최종편까지 스토리가 전부 밀려 있었기에 그걸 지급받는 화면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인벤토리에 들어가니 카드는 사용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앞서 이 계정을 거쳐 간 두 선생님들의 학생들을 잘 부탁하는 마음이 내게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 카드는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을 잘 부탁한다고 전해준 먼젓번 두 명의 선생님과 '나'를 위해,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네 번째 선생님에게 학생들을 잘 부탁하는 나의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