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9 게임고찰 G] 39. 붕괴: 스타레일 - 개연성은 게임 개발의 기본이 아닌건가?

[이 글은 해당 게임의 스토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글도 평소보다 조금 길다.)

오늘은 서론을 조금 길게 가져가려고 한다.

붕괴: 스타레일.

2023년 4월 26일에 출시 되었으며, 출시 5일만에 글로벌 매출 10위권을 찍는 등 대단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게임이다. 해당 게임 개발사인 미호요 작품을 내가 한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것도 있고, 내 블로그 이웃 중에 원신 / 붕괴 등 미호요 광팬이신 분들의 포교 활동 영향을 받은 것도 있어 -> 시간을 들여 붕괴: 스타레일을 즐겨보자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이 게임을 즐겼을 때의 내 인상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모바일, 콘솔을 가리지 않고 턴 전략 시스템을 이렇게 가져가야 했나, 이해하기도 어려운 세계관 설정을 이렇게 다량 들이부어야 했나 등의 혹평을 남긴 유저들이 더러 있었으나, 개발사 나름의 지향하는 바와 조율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나올 수 있다. 나름 타겟팅을 지정하고 개발한 결과다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내가 붕괴: 스타레일에 대한 글을 적게 된다면 이런 주제를 좀더 풀어 적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필드: 야릴로 VI 에서 살펴볼 수 있는 모든 콘텐츠를 클리어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게임과 비교할 경우, 붕괴: 스타레일이 개연성을 의식한 개발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게임에 대한 몰입감이 상당히 떨어지게 되었다. 게임 스토리 부문 평가를 할 때 반드시 '감점' 영역으로 언급해야 되는 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개인의 취향에 맞지 않은 게임이었다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기엔 붕괴: 스타레일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점이 3개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1. 평행 세계관을 공유한 인기 작품이 따로 서비스 중이라는 것.

2. 세계관 설정을 위한 부가 콘텐츠를 상당량 준비한 작품이라는 것.

3. 재미를 느끼고 아낌없이 과금을 하는 유저들 중, 개연성 관련 문제가 게임 몰입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거나 / 애당초 인식을 하지 못한 유저의 비중이 상당수 있다는 것.

그래.

이건 붕괴: 스타레일을 평가하거나 비판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이 아니다. 지금은 이런 방침으로 개발해도 크게 문제 없는 것인가? 처음부터 개발 우선 순위를 이렇게 두고 전략적으로 접근한 결과인가? 그것은 온라인이나 모바일 플랫폼에 한정한 이야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선입관도 있겠다만, 나는 게임 개발의 기본에는 개연성이 깊이 관계되어 있다고 오랜 시간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듯이,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쯔꾸르 게임에서조차 메인 스토리가 조금 진행되면, 주변 NPC 들의 대사가 바뀌는 등 - 개연성을 유지하기 위한 흔적들을 봐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붕괴: 스타레일의 스토리 관련 디자인은 평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게임의 NPC 몇 명을 예시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기본 멘트

NPC 에게 대화를 요청할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이다.

NPC의 기본 멘트는 어떤 상황에 놓여도 말하는데 이상하지 않은 주제 /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주제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상황이 바뀌면 멘트를 바꿔야 개연성이 유지되기에 - 스토리 비중을 크게 보지 않는 개발자라면 전자를 선택하는 편이 작업에 유리하다.

그런데 붕괴: 스타레일은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주제를 기본 멘트로 삼는 NPC가 있음에도, 상황 변화에 따른 멘트 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Ex: 마을 소문을 주위에 전달하는 NPC, 현재의 환경에 고통받고 있던 NPC)

(2) 선택 멘트

처음 NPC 와 조우했을 때 고를 수 있는 멘트다.

현 상황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3) 선택 멘트

메인 스토리가 완료되고, 주변 상황이 크게 바뀐 후 - 새롭게 생성되는 멘트다.

역시 현 상황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메인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주변 상황이 크게 변화하는 것은 어느 게임이든 똑같기에, 개연성을 지키는 과정에서 주변 NPC 들의 대사도 바꾸는 작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역은 신경쓰면 쓸수록 개발자의 작업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는 것에 반해, 유저가 눈치채지 못하면 그대로 사라지는 콘텐츠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RPG는 메인 챕터가 바뀔 때를 기점으로, NPC의 대사 및 행동을 조정하는 편이다. [이 작업 간격을 굉장히 촘촘히 해서 스토리 및 세계관 몰입에 극찬을 받는 게임으로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CRPG)', '영웅전설(JRPG)' 등이 있다.]

붕괴: 스타레일도 기본적으론 메인 챕터가 바뀔 때를 기점으로 NPC 대사 및 행동이 바뀌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존 게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 대사를 삭제하고 새로운 대사를 넣는 것이 아닌 -> 기존 대사를 보존하고, 새로운 대사를 추가로 넣는 형태로 만들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배경이었던 '헤르타 우주정거장' 이나, '야릴로 VI의 행정구역'은 메인 스토리 진행 전과 후의 차이가 환경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던 만큼, 플레이어와 NPC간 대화에 별다른 괴리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지하에서 고립되었다 구원되는 입장인 '볼더 타운'은 큰 환경 변화가 생긴 곳인만큼, NPC와의 대화 및 행동에서 개연성을 느끼기 어려운 모습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게임의 스토리가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기 이전의 문제다. (여기에 기존 대사만 있는 NPC의 경우, 새로운 대사가 별도로 추가된 것도 아니기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왜 저런 방식으로 구현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추측은 기획 / 프로그래밍적 시각으로 넘어가야 되는 부분인만큼 생략하겠다.

"마을을 구원한 당사자보다 더 기뻐해야 할 사람은 마을 주민이어야 할텐데, 기뻐하는 주민은 메인 퀘스트와 연류된 몇 명의 NPC 가 전부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듯 - 처음 주인공 일행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마을 주민과 관련된 서브 퀘스트가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말이나 행동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 퀘스트가 끝나면 다시 마을 방문 이전으로 대화가 돌아갔다."

붕괴: 스타레일을 즐기다 몰입도가 크게 떨어지는 사람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느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엔 이르다. 왜냐하면, 붕괴: 스타레일은 세계관 몰입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해온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공식 유튜브 채널에 가면, 붕괴: 스타레일과 관련한 단편 애니메이션 / 음악회 / 교수 강연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게임 할 때는 건드릴 일도 없을 것 같은 쓰레기통 / 가로등 / 우체통 등에도 갖은 상호작용 이벤트를 집어넣었고, 마을 NPC와 꼼꼼히 대화를 나누다 보면 특정한 보상을 얻거나 도전과제가 완료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까지 준비한 게임에서 발생한 개연성 이슈이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저 스토리 개발에 힘을 들이지 않은 게임이라면, 세계관 몰입을 위한 콘텐츠도 그정도로 힘을 들일 필요가 없으니까. 저렇게 준비된 콘텐츠들.. 다 일회성이면 소모되는 것들이잖아?

그래. 붕괴: 스타레일은 정말 준비되어 있는게 많은 게임이다. 내가 앞서 몰입도가 크게 떨어져 서운한 점이 있다 말했다만, 그 감상은 그저 세계관을 음미하거나 / 보상을 찾아 돌아다니는 정도가 아닌... 스토리 진행이나 성장과는 전혀 관련 없는 곳에 적지 않은 시간을 쏟으며 몇 번이고 세계관을 씹어보려 해야 나타나는 것이다.

(사족 / 번외) [붕괴: 스타레일과 관련된 소소한 괴리들]

1. 한밤중에 행동하려는데 마을에는 아이들을 포함하여 여러 어른이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다.

2. 첫 여행 행성인 야릴로 VI는 오랜 시간동안 세계와 단절된 한파 지역이며, 매년 얼어죽는 경비대도 발생하고 있을 정도로 그 추위가 심각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나는 현지인(수집 / 컨트롤 가능 캐릭터)은 대부분은 매우 얇은 의상을 걸치고 있으며, 퀘스트 진행을 위해 한파의 중심으로 향할 때도 '춥다!' 소리 정도로 끝난다. 세계관 설명으로 보면, 밖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경비대로부터 방한약을 지급받아 복용한다거나)를 할 법도 한데, 그런것 하나도 준비 안하고 그냥 간다. (그나마 주인공 일행은 개척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설명이 있지만, 제레 너는..) 메인 스토리 상에는 함께하는 움직이는 입장은 아니지만, 야릴로 태생인 클라라가 맨발로 활동한다는 설정도 무섭다.

3. 쿠쿠리아(수호자)를 쓰러트린 직후 여러 서브퀘스트가 열리는데, 이 서브 퀘스트를 바로 수행할 경우 -> 메인 스토리 상 지하 봉쇄가 풀리지 않았는데도, 지하에서 사는 NPC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 / 이미 한참 분위기를 만끽한 듯한 대사를 꺼내기 시작한다.

4. 야릴로 VI는 700년 동안 세계에서 고립된 행성인데, 우주 항성계에서 보편화된 '신용 포인트'를 사용해 물품을 구매할 수 있다.

세계관을 위해 자잘한 설정, 여기저기 텍스트를 뿌려넣은 것 치고는 중요한 플레이 단계에서 개연성 확립이 안되고 있다라... 처음에는 이런 모습을 보고 붕괴: 스타레일이 상체만 튼튼하고 하체가 상대적으로 부실한 게임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한 생각이지, '게임의 서비스'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게임의 기본에 개연성을 고집한 것은 '완성도'에 기반한 고집이기도 하다. 게임 진행에 아무런 의문도 흠 잡을 것도 없는 것이 완성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게임 서비스는 '누가 얼만큼 완벽하게 만드느냐' 경연 대회를 하는 곳이 아니다. 유저로 하여금 게임을 계속 하고 싶다는 매력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첫인상을 강하게 어필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트레일러를 보고 / 게임을 설치해 입문하는 첫인상 단계에서 개연성이 요구되는 일은 거의 없다. 게임 세계관의 앞뒤를 느낄 정도의 충분한 정보가 당시의 유저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입문한 이후에도 어지간히 꼬집고 돌아다니지 않는한 개연성의 부재는 게임을 몰입도를 저해하는데 있어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캐릭터 수집과 / 성장에 관심있는 유저 비율이 높다면, 하나하나 개연성이 있는지 검수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보다 ->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하는게 더 효율적인 게임 서비스나 퍼포먼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 캐릭터 중심 스토리)

어떻게 보면, 적지 않은 수의 콘텐츠를 준비했던 붕괴: 스타레일이니까 이러고 넘어갈 수 있었던 사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게임에서 같은 상황을 경험했다면 제대로 비판해볼만한 시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이번 기록을 정리하며 나는 이렇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유저가 바라는 것을 포함한 다수의 콘텐츠가 들어간 게임이라면, 게임 서비스의 중심에는 개연성 확립이나 완성도 조정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말이다.

기록은 대략 여기까지다.

처음에는 붕괴: 스타레일을 진행하며 느꼈던 몇 개의 소화불량을 기록하고 싶었다. 내가 사이버펑크 2077을 처음 접했을 때, 개연성을 느끼기 어려운 몇 NPC들의 모습을 보며 앵벌과 퀘스트에 집중하게 되었던 기억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다만, 비슷한 경험을 두번 겪은 것도 있고, 캐릭터 매력을 강화시킨 서브컬쳐계 게임인 만큼 다른 시각에서 천천히 작품을 바라보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