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세계 만국의 공통어, 포켓몬고
국적도 인종도 다르지만 포켓몬고로 하나 되다.
한때 포켓몬고에 빠진 적이 있다. 게임 자체가 재미있다기보다는 걷기 운동을 하고 몸을 움직이려 하면서 스스로 게으름을 경계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아들 녀석이 포켓몬고 세대라 돈만 생기면 동네 문방구로 달려가 포켓몬고 카드를 모으고, 8세대 포켓몬의 이름과 특징을 모두 외우는가 하면 국내에 포켓몬고가 정식 출시되기 전에 강릉으로 먼저 가자고 재촉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주중에는 공을 모아주고, 잡몬들을 잡아 주면 주말에 같이 동네 공원을 다니며 포켓몬을 잡았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아들은 시큰둥하고, 내가 그 게임에 몰입하며 도감을 채우고 전설 몬 레이드를 하며 점점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포켓몬고 게임을 모티브로 한 현빈, 박신혜 주연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드라마도 재미있게 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새 2천만 CP를 모아서 레벨은 만렙인 40에 도달했고, 부계와 부부계를 키우기도 했으며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가입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전설 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늘 핸드폰을 보면서 몬을 잡을 수 없으니 자동으로 몬을 잡아주는 속칭 포고플(포켓몬고 플러스)을 사기도 하였다. 몬을 잡는 과정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지 않아도 되는 포고플은 게임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포켓몬고의 인연으로 가까이 지내는 동네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게임, 포켓몬고 하면 어린아이들만 하는 게임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하다. 다들 포켓몬고를 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각자의 이유로 게임에 대한 몰입도는 아주 깊다. 포켓몬고가 이어준 인연 중에는 고향 선배이자 대학 선배인 채권 딜러 부부, 간호사, S전자 과장, 약사, 의사, 사모펀드 CEO 등 배경도 다양하다. 다들 포켓몬고가 이어준 기이한(?) 인연들이다.
그러다가 비엔나로 가게 되었다. 초기에 정착하느라 가족을 두고 혼자 먼저 가서 지낸 시간이 석 달 여. 주말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혼자 비엔나 시내도 둘러볼 겸 몬도 잡을 겸해서 시내에 자주 갔다. 시내 길을 익히고 건물들을 감상하면서 몬도 잡고, 걷기 운동도 하는 일석삼조. 그러던 어느 날 갸라돈(인기 절정의 몬이다) 레이드를 한 시간 하는 이벤트가 있었고 혼자는 절대 잡을 수 없는 몬이라 시내에 가면 사람들이 모여서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갔더니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전설 레이드가 열리는 체육관을 찾아다니면서 몬을 잡고 있었다. 머쓱하기는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나도 끼워 달라고 했더니 다들 '열린 마음으로 반가이' 같이 하자고 오퍼를 했다. 참고로 보통은 전설 레이드는 위치 조작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현장에 모인 사람들끼리만 비공개 방을 만들어하기 때문에 같이 하자는 공감대가 없으면 같이 하기가 어렵다. 물론 누구나 참여하는 공개방도 있다. 그렇게 그날 포켓몬고로 오스트리아 현지인들과 한 시간 정도 '원팀'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달에 한번 열리는 커뮤니티 데이가 있었다. 비엔나에 오래 거주했던 지인 J가 커뮤니티 데이에는 Staat Park에 모든 포고인들이 모인다고 해서 나도 갔다. 그날 수천 명의 비엔나 포고인들이 그 공원에 모여 향로와 루어 모듈을 켜고 세 시간 동안 쏟아져 나오는 그날의 몬과 색이 다른(영어로는 Shiny, 일본어로는 이로치) 그날의 몬을 잡는다. 서로 누가 많이 잡나 내기를 하는 것처럼 경쟁적이다. 서울에서도 보지 못한 진기한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진다. 심지어 내 숙소 근처에서 가끔 보던 현지인 친구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그날의 장면은 벤치에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몬을 잡는데 열중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네 개의 폰을 담은 틀을 들고는 동시에 이 폰 저 폰 연신 커브볼을 날리면서 몬을 잡는 오타쿠. 그날도 그렇게 포켓몬고로 하나가 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포켓몬고로 현지인들과 '친구'를 맺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친구 레벨을 올린 적도 있고, 처음으로 비엔나 하이킹 길을 걷고 난 후 포도밭 한가운데 있는 호이리게에서 혼자 와인과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몬을 잡고 있는데 지나가던 현지인 하수가 다가오더니 나의 레벨과 몬 박스를 보면서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친구를 맺자고 졸랐던 적도 있다. 지금은 시들해져서 더 이상 포켓몬고를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핸드폰 위에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포고인들을 보면 눈이 한번 더 간다. 그렇게 포켓몬고는 에스페란토어를 대신하는 만국의 공통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