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V4(p.310 ~440 )
"세상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지 궁금한 적 있나요?"(318)
지금것 이 학생들은 여러 해 동안 하나의 종만을 연구했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장장 사흘간 전복을 기도하고 학생들이 '호모 사피엔스'에서 눈을 돌려 우리와 지구를 함께 쓰는 600만 종을 쳐다보도록 했다.(320)
과학의 오만에 사로잡힌 열정적인 젊은 박사이던 나는 내가 유일한 스승이라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다. 아니 , 당이야말로 진짜 스승이다. 학생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챙김뿐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열린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생명 세계와 호혜적 관계를 맺는 형식이다.
(327)
나는 가문비나무님에게 내가 누구이고 왜 왔는지 이야기한다. 몇 마디는 포타와토미어로, 몇 마디는 영어로, 땅을 파도 되겠느냐고 그들의 너그러운 허락을 구한다. 그들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이 어여쁜 젊은이들에게 나누어주겠느냐고. 그들의 진짜 몸과 가르침을 주겠느냐고 묻는다. (343)
학생들은 뿌리를 캐고 나면 늘 뭔가 달라진다. 마치 거기 잇는 줄 몰랐던 품에 안겼다 나오는 것처럼 다정하고 개방적인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선물로서의 세상에 마음을 여는 것, 대지가 나를 돌보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저기 있으리라는 앎으로 충만한 것이 어떤 느낌인지 떠올린다.(348)
나는 학생들에게 담배 선물이 물질적 선물이 아니라 영적인 선물임을,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수단임을 상기시킨다. 오랫동안 연장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는데, 다양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한사람은 감사가 우리의 유일한 책무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 대지님이 우리에게 선사한 것에 필적하는 것을 우리가 돌려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라고 경고했다.(350)
종종 나말고도 이곳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곶에 서서 간절한 눈빛으로 바다를 쳐다보며 머리 위 바람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일 때, 그것이 그 기억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일이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365)
우리 현장생물학자에게는 이것이 삶의 목적이다. 야외에서 다른 종의, 대체로 우리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종의 활기찬 현전을 목격하는 것. 우리는 그들의 발치에 앉아 귀를 기울인다. 포타와토미족 이야기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식물이 한 언어를 쓰던 때가 있다고 기억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물을 사라졌고 우리는 그만큼 빈곤해졌다. 같은 언어를 말하지 못하기에 과학자로서 우리의 임무는 이야기를 최대한 멋지게 엮어내는 것이다. (370)
언어가 죽으면 사라지는 것은 말만이 아니다. 언어는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깃드는 장소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이다.(379)
과학자들은 조류와 균류의 결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궁금해서 두 종을 하나로 살아가게 유도하는 유인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두 종을 합치고 조류와 균류 둘 다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해도 둘은 가장 플라토닉한 룸메이트처럼 한 배양 접시 안에서 서로 쌀살맞게 대하고 독자적인 삶을 고수했다. 혼란에 빠진 과학자들은 서식처에서 이 요인 저 요인을 바꾸기 시작했으나 여전의 지의류는 탄생하지 않았다. 자원을 심하게 제약했을 때에야. 괴롭고 힘겨운 조건을 만들었을 때에야 조류와 균류는 서로에게 돌아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균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조류를 감싸지 않았으며 조류는 여간 괴롭지 않으면 균사를 환영하지 않았다.(399)
바람 소리에, 붉은꼬리지빠귀 울음 소리에, 우렛소리에, 주체할 수 없이 커져만 가는 우리의 굶주림에, 돌의 귀여, 우리가 스스로 보여준 호혜적 결혼에 담긴 지혜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대가 겪은 혹독한 후빙기 세계를 우리도 겪게 될 것 같아요. 우리가 그대처러 대지와 결혼할 때 우리가 부르는 환희의 송가를 그대가 들어준다면, 구원은 거기에 있어요.(405)
묵은 무노하는 묵은 숲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절멸하지 않았다. 땅에는 과거의 기억과 재생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단지 민족성이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땅과 사람 사이의 호혜성에서 비롯하는 관계의 무제다. 프랜츠는 묵은 숲을 가꾸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또 다른 꿈은 온전하고 치유된 묵은 문화, 즉 세계관을 설파하는 것이었다.(426)
이곳 우림에서 , 나는 수동적이고 보호받는 비의 방관자에 머물고 싶지 않다. 폭우의 일부가 되어, 바ㄹ밑에서 꼼지락거리는 시커먼 부식토와 함께 푹 젖고 싶다. 북슬북슬한 개잎갈나무처럼 빗속에 서서 껍질 속으로 스며드는 물을 느기고 싶다. 우리를 가르는 장벽을 물이 녹여줬으면 좋겠다. 개잎갈나무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개잎갈나무가 아는 것을 알고 싶다.(432)
객관적 실재로서의 시간은 내게 별 의미가 없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다. 분과 해가, 우리가 만든 기준이, 하루살이와 개잎갈나무에도 같은 의미일까?(434)
빗소리를 들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사건과 사건의 간격으로 시간을 측정한다면 오리나무의 적하시간은 단풍나무의 적하시간과 다르다. 이 숲은 저마다 다른 시간의 무늬로 짜여있다. 웅덩이 표면이 저마다 다른 비의 무늬로 짜여있듯, 젓나무 비늘잎은 비의 고주파음을 내며 떨어지고 가지는 커다란 물방울처럼 '첨벙'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나무는 드물게 들리는 와르르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드문 것은 우리의 시간 척도가 강의 척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제각각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순간들만 있을 뿐.(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