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나히다 PV에서 놀라웠던 몇 가지

<원신>이 3.0 수메르 지역 업데이트를 기점으로 정말 놀라울 정도로 순항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원신> 관련 영상을 많이 보는 제 유튜브 알고리즘의 탓이겠지만, <원신> 시작했다는 유튜버들도 요근래 많이 목격했다는 기분입니다. <원신>을 최근에 시작했다거나 <원신>이 궁금해서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아졌죠. 모름지기 덕후의 기쁨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 아닐까요. 겉으론 차분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메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원신>에 정착하는 기점으로 불리는 리월 스토리, 메인에서는 다소 아쉬운 완성도를 보여줬지만 지역과 캐릭터를 추가하며 모자랐던 부분을 착실히 채워나가며 완성한 이나즈마 스토리를 지나, 드디어 네번째 지역이 모습을 드러냈죠. 수메르 스토리는 서장에 해당되는 1, 2막에서부터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 보이는 스토리와 탄탄한 수메르 지역 세계관을 선보이며 이전까지의 스토리를 초월하는 압도적인 첫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전율을 불러온 3.0 버전 PV 음악과 함께요.

이 아래부터 나히다라는 캐릭터의 특성상

수메르 지역 스토리의 스포일러를

간접적으로 포함할 수 있습니다

수메르 스토리의 중심에는 수메르를 대표하는 ’지혜‘의 신이자, ’풀 원소‘의 신, 나히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3.2 업데이트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투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나히다라는 캐릭터 어필이 시작되었죠. <원신>의 캐릭터 어필 프로세스의 첫 단추인 캐릭터 PV는 캐릭터의 첫인상을 부여하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고, 나히다 PV는 ‘생일 축하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아마 나히다 PV는 앞으로 어떤 캐릭터의 PV를 보더라도 제가 <원신>에서 한 손 안에 꼽을 정도로 강렬하게 기억하는 캐릭터 PV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첫번째 이유는 PV에서 보여주는 연출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그 PV 안에서 보여주는 스토리의 사이즈 때문입니다.

PV 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역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축약된 언어입니다. 라이덴 쇼군 PV는 대사 한 마디도 없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제일 말이 없는 PV라는 타이틀을 줄 수는 없게 되었지만, 아래 대사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구성된 나히다 PV 또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축약 구성이었죠.

꽃마차가 덜컹거려서 나히다는 눈을 떴어.

나히다는 꿈을 꿨는데, 꿈에서 오늘이 나히다의 생일이었대

꿈 속에서 꽃의 기사와 시종들이 나히다를 발견했어

신이시여, 드디어 찾았군요. 다들 당신과 만나는 걸 기대하고 있답니다

화신 탄신 축제가 열리고, 사람들은 웃으며 나히다 주위를 맴돌았어

나히다가 꽃마차에 올라 손을 흔들며 인사할 때까지

대사는 반복할 뿐입니다. 바뀌는 건 그저 같은 대사를 반복할 때마다 보이는 풍경이죠. 꽃의 기사와 꽃의 기사가 되었어야할 사람이 교차하고, 신을 만나는 기대와 신을 발견하는 기대가 교차하고, 꽃마차와 꽃마차였어야 하는 곳이 교차하며, 나히다 PV는 같은 사건 구조 안에 전혀 다른 상황과 사건들을 넣어 교차합니다.

"꽃의 기사와 시종들이 나히다를 발견했어"라는 문장 아래서 전개된 두 가지 이야기

하지만 이런 '다른 방식으로 보기'만이 나히다 PV의 전율을 이끌어낸 것은 아닙니다. 나히다 PV의 전율은 두번째 요소, 이 짧은 PV가 도합 12시간에 근접하는 수메르 메인 스토리를 모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에서 찾아오죠. 수메르 스토리의 서장을 접했던 저는, 대사가 2번째 반복되는 순간부터 설마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번째 반복이 시작되면서, 그 설마하는 기분은 나히다 PV 안에 수메르 스토리를 통째로 넣으려 하는구나, 라는 확신으로 바뀌었죠.

반복, <원신>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윤회'는 수메르 스토리의 핵심입니다.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매일 똑같기에 별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 안에서 이질적인 것들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인공이자 유저에게 주어진 임무죠. 윤회는 대처하기에 따라, 그저 실패만을 무기력하게 반복할 수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 해결책을 마련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굳이 나히다 PV를 행복한 꿈에서 절망적인 현실이라는 방향으로 구성한 것도 이 양면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출 방향이 유저에게 이 방향을 반대로 바꿔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윤회는 단지 무기력한 반복 상태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이런 윤회는 수메르를 대표하는 키워드인 '지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제작진은 지혜를 새로운 것의 창조나 발견이 아닌, 본래 있던 것을 다르게 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 같습니다. 즉, 지혜란 대단한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일상과 관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모여 만들어지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 또 거대한 집합체라고 보는 것이죠.

윤회라는 이름의 반복으로 수메르 이야기에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함축하고, 구체적인 스포일러를 회피하며 영상 구도를 통해 수메르 지역의 갈등 구조를 압축하고, 이것을 정해진 대사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담아낸 나히다 PV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온 PV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히다 PV가 공개된 뒤로 아카데미아라는 집단에 분노를 표한 것이겠죠. 라이덴 PV에서도 라이덴의 불행한 과거 이야기가 드러났지만, 라이덴을 불행하게 만든 존재를 향해 책임을 묻는 반응까지는 나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나히다 PV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사뭇 달라보입니다. 물론, 나히다의 포지션과 라이덴의 포지션은 차이가 있다는 점과 나히다가 아동형 캐릭터인 점까지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요.

이 구도 하나면 수메르 스토리는 충분히 다 설명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목소리 연기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죠. 화면 연출과 PV 내용을 우선시해서 이야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느낀 것처럼 이 PV의 분위기를 잘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나히다의 목소리를 담당하신 박시윤 성우님의 공이 큽니다. PV에서 비춰지는 나히다의 표정과 잘 맞춰서, 같은 대사를 다른 톤으로 연기하며 호소력 있게 연기하셨죠.

이번 나히다 PV가 워낙 인상깊었다보니 간만에 일본 원신 채널에도 들어가 타무라 유카리 성우님이 연기하신 일본판 PV도 봤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PV에서 어떤 디렉팅 차이가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본 PV에서는 나히다를 겉보기에만 아이의 모습이지 사실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서 마치 체념 같은 여유가 있는 '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본 PV에서는 대사가 반복되어도 담담하게 내게 있었던 일을 읊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 담담함 안에서도 어딘가 느껴지는 쓸쓸함을 표현한 건 역시 레전드 성우의 품격이 느껴지는 부분이었지만, 한국 PV와 비교했을 때는 그렇게 드러나는 감정이 크지 않았죠.

반면에 한국 PV에서는 나히다를 우월한 지식과 지혜가 있지만 아이 같은 겉모습처럼 불완전한 아이의 모습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PV에서 나히다의 목소리는 마치 즐겁고 슬픈 감정에 솔직한 아이의 모습처럼, 즐거운 꿈에 정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정말 슬퍼하며 쓸쓸한 현실에 정말 쓸쓸해하는 감정의 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PV에서나 일본 PV에서나 나히다를 딱하게 생각하는 댓글이 줄을 이루지만, 한국 PV에서 유독 '아카데미아 폭파시키러 갈 파티원 모집합니다' 같은 분노의 댓글이 많은 것을 보면 한국 PV에서 나히다의 목소리가 더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겠죠. 여담이지만 박시윤 성우님은 스파이 패밀리 더빙판에서 아냐 역할을 맡고 계신데, 이 정도면 아이 역할이 특기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어떤 게 더 나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비교가 아닙니다. 불완전한 아이의 모습도, 웬만한 어른에게도 없는 강직한 책임감과 지혜가 있는 신의 모습도 모두 나히다의 모습이지만, 어떤 부분이 좀 더 나히다의 모습으로 다가왔는지는 온전히 유저에게 달려있을 겁니다. 다만 두 나라의 PV 이야기를 꺼내본 건, 나히다라는 캐릭터의 다양한 면을 소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찌 되었건, 나히다가 앞으로는 쭈욱 꽃길 위를 걷고 있기를 바라면서, 꽤 몰입하면서 봤었던 나히다 PV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나히다 PV 보면서 가슴이 엄청 먹먹했고, 수메르 스토리 보면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수메르 스토리가 궁금하시다면 <원신> 한 번 츄라이해보지 않으실래요? 지금 시작하시면 수메르 스토리까지 도달하는 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리실 지도 모르겠지만, 감동 한 스푼 얻어가고 싶은 분이라면 이런 긴 코스 요리 한 접시 쯤 맛보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