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팬픽, 바람이 불면 네게로 돌아오는 학.

"속세는 아득해졌고, 마침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눈을 감고 천천히 읊조리던 운 선생이 살포시 눈을 뜬다.

"이게 사원을 가른 신녀의 결말이에요."

그녀가 꺼낸 말은 허공에 맴돌다, 시간이 지나 정적이 되어 내려앉는다.

태양은 지평선에 닿아 잘게 바스러지고 있다.

으깨진 태양의 조각들이 하늘에 붉게 녹아 스며들어간다.

하늘을 통째로 휘감는 불길이 굳게 얼어붙어 있던 기억을 조금씩 녹여간다.

  이제는 얼어붙고 성에가 끼어 흐릿해진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득한 의식의 너머에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갑작스럽게, 조금은 우악스럽게 가슴 깊숙히 들어와서 헤짚는 그녀의 이야기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다.

기억의 파편의 가장자리에 긁히고 베인 듯하다.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심지어는 원소의 감각이나 선술의 감각까지 다 통틀어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이상한 감각.

한 박자 늦게 그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던 감정은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붉은 끈을 움켜쥔다.

시야의 구석에서 별빛이 아른거린다.

그제야 페이몬과 여행자가 걱정스레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깨닫는다.

너희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때마다 차가운 손끝이 조금 녹아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이 이야기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만약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저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나도 옅어져서 이제는 스스로도 감정의 색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아직 그 기억은 약간의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리월의 인간들은 소설과 경극을 즐긴다고 한다.

현실보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동경을 품으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리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끌림을 느끼는 것은 아마 동경이라는 감정이 내게도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이 희망과 즐거움을 얻는다면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다만 그 소녀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 용감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너는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준다.

내가 뭐라고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너의 그 빛나는 눈동자에 드리운 그늘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공기의 흐름이 잠깐 불규칙하게 변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것이 네가 내쉰 안도의 한숨이라는 것을 깨닫자 어딘가 모르게 따스함이 피부로 스며든다.

페이몬이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그리고 너는 쑥쓰러운 듯이 어여쁜 미소를 그린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순간적으로 일렁인다.

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아내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지만 손 끝에 닿을락말락 하던 그 감정은 끝내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그럼 이제 쇄성철광을 찾으러 가볼까요?"

  운 선생의 말에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래, 딴 생각은 나중에 해도 좋아.

지금은 네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바람마저 뒤로하고 허공을 밟으며 리월의 산봉우리를 뛰어넘는다.

방금 지나친 산봉우리가 다음 순간 아득히 멀어진다.

공기의 저항을 억지로 눌러 짓이기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듯이 달린다.

걱정되어 잠시 뒤를 돌아보자 너는 아무렇지 않게 따라오고 있다.

바람 원소가 너를 비호하듯 감싸고 있다.

이 속도를 따라오는 인간은 처음 봤다.

너를 신경쓰느라 순간적으로 속도를 낮추자 너는 나를 지나쳐 앞선다.

전신을 짓누르던 풍압이 거짓말같이 사라진다.

바람을 맞으며 앞장서는 너에게 그러지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철광 매장지로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너는 자꾸만 나를 돌아봐준다.

걱정해주는걸까?

내 본래의 힘을 알면서 왜 자꾸 걱정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야.

눈이 마주치자 어여쁜 눈웃음을 지어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는 네가 어째선지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다.

입가가 느슨해지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든다.

열기를 동반하진 않지만 따스하게 온몸에 온기가 도는 듯한 착각이 들어.

네가 가진 힘의 일부인걸까?

만지면 바스라질 듯이 보이는 너에게서는 인간치고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강한 기운은 어딘지 모르게 따스하고 포근해서 같이 있어도 안심이 돼.

어느새 밤이 깊어져 산을 뒤덮는 한기가 피부를 엄습한다.

어스름한 월광이 하늘에 흘러다니고 물에 비친 밤하늘은 짙은 잿빛으로 빛난다.

아이테르, 너의 이름은 선법의 주문보다 강렬한 어감이 들어.

너의 기억만으로 나는 앞으로 긴 세월을 따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지면으로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나 차갑고 흐릿했던 달빛이 부드럽게 피부를 덮는다.

너의 온기는 차가운 리월을 녹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