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바바라 맹랑한 년
나는 잠실 종합 운동장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이마는 번들거리고, 물 만난 어린 물고기 같은 젊은이들의 어디로 튈지 불안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다 안다, 너희들 전부 나만 보고 있잖아, 하는 듯 자신만만하게 노골적인 춤동작을 선보이는 소녀가 보였고. 반면 대부분의 젊은 남성들은 상대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치는 듯한 제스쳐를 보였다. 당하는 쪽은 팔이 꺾어도 쵸크 동작으로 머리를 압박당해도 비굴하게 웃고만 있었다. 여차저차 험악한 분위기에 행여 몸이 부딪칠까봐 조심해야 했는데, 자세히 보면 그들은 언제나 멍청히 서 있는 사람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몸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도발 행동들이 나와 같은 사람을 타겟으로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멍청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파리가 꼬이듯 악당들이 냄새를 맡고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월등한지 눈 앞에서 증명받는 일뿐이다. 그것만 충족된다면 옥상에서도 뛰어내릴 용기가 차고 넘친다. 그들은 늑대처럼 몰려다니고, 시비를 걸고, 욕을 한다. 그들이 모욕이라 생각하는 것은, 미리부터 첫단계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검증이 완료된 시나리오로, 심한 모욕이 무엇인지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인지하고 있기에 어찌보면 맥락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모욕을 줄 수가 있는 것. 상대가 무엇으로 화를 내고, 뚜껑이 열리는지 정확한 맥락을 짚어낼 수가 있는 것. 성적인 불쾌감을 주는 욕도 그에 적합한 상대에게 효과가 있고, 고집이 쎄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보다는 그의 긍지를 도발하는 욕이 적합하고, 남자에게 한창 사랑받을 나이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어린 소녀에게는 네 주제를 알아하고 천민 또는 동물을 대하는 듯한 막무가내식 욕이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는데. 교활한 놈은 요령 좋게 상대를 화나게 만들 줄 알고, 이용한다. 나는 행사 관리자들이 차량을 통제하고 있는 도로가쪽으로 멀리 떨어졌다. 여자애들의 비명 소리가 조금 순화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술 취한 듯 예상치 못하게 몸을 부딪쳐 오는 깡패놈들을 피할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몇몇 놈들이 좁은 공터를 원을 그리면서 전력질주를 하다가 왜일까 내 쪽을 엿보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려는 욕심인가. 나는 순순히 더 멀찍히 뒤로 물러났다. 도로가 후미로 한창 개나리가 만개한 후미진 곳을 골랐다. 차량을 막는 커다란 바리케이트 덕택에 공간도 넓고 적당한 그늘도 있었고, 담배 꽁초를 아무때고 집어던질 수 있는 하수구도 완비되어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 사온 시원한 500ml 식혜를 땄다. 그리고 잠시 헛기침을 하다가 주머니를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저앉으면서 인도턱에 엉덩이를 갖다댔다.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원신 캐릭터 코스프레가 신기한 구경이긴 하겠다. 그러니까 캐릭터의 실사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꽁짜니까.
바바라를 코스프레하는 소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가끔씩 웃는 얼굴이 보였는데, 머랄까 웃는 표정이 가식적이면서도 무언가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선민의식 같은 게 느껴졌다. 절대 눈을 내리까는 법이 없었고, 어느 하나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괴상한 춤동작을 가끔씩 선보이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당혹케 만드는 모양이었다.
거기. 아저씨.
나는 메모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바바라를 쳐다봤다. 지금 나를 지목하는 건가. 믿기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내 주변에 다른 사람이 또 없나 둘러보았다. 바바라는 조금 화가 난 몸짓으로 여차하면 여기까지 돌격할 태세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모두 장군을 호위한 병사들처럼 일제히 나를 쏘아보았다.
네?
냄새나잖아요.
네?
여기서 담배피지 말라고요.
네. 죄송합니다.
나는 열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의사소통하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답답해서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급히 바바라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다는 것이 한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바바라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바닥에 힘껏 내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씨발. 여기서 담배피지 말라고.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급히 담배를 발로 비벼껐다.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조금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 있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야외에서 열걸음 정도면 간접 흡연으로 피해가 갈 정도는 아닌데. 설령 피해가 간다하더라도 내가 열걸음을 물러난 성의를 봐서라도 이렇게 함부로 대할 것은 아닌데. 아. 내가 살던 곳에서는 단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지. 사람이 옆에 있건 없건 담배를 피워댔잖아. 버스에서도 피웠어. 어쩌면 바바라 저 분이 살던 곳은 엄격한 공중도덕을 지키는 곳일지도. 홍콩이었던가. 침만 뺏어도 벌금 십 만원이고 껌은 아예 금지라던대. 나는 이렇게까지 많은 생각을 하진 못했지만, 가슴 한쪽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화끈했고, 대놓고 쳐다보는 바바라의 면상이 머릿속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재현되기 시작했다. 저 면상을 어떻게든 내 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고, 당장에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 심한 억하심정이 온몸을 타고 활활 번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패티병을 있는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제부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바바라는 양손를 허리에 대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이 어느새 슬금슬금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바라는 난데없이 밝게 웃으면서 즉흥 연기를 했다.
우씨. 우씨. 난 괜찮아요.
나는 바라라의 그 멋진 연기에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와. 잘하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갑자기 왜 그러지. 조금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난폭하게 휘어잡고는 콘크리트 바닥까지 박살을 낼 태세로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양손을 붙잡는 단단한 힘이 느껴졌고, 놀랍게도 나는 공중에 떠서 간단하게 짐처럼 운반되고 있는 것이었다. 바바라와 다르게 젊은이들의 얼굴은 돌덩이 같았다. 사람 같지 않았고, 자비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예상이 들면서 나는 조금 비굴하더라도 기회를 엿봐야겠다 결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