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X] 극복의 아이콘

글쓰기 미션:

1.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기 자신의 성장 과정을 스토리 텔링 형식으로 정리해 보자.

TIP: '인생에서 겪은 크고 작은 이슈들, 그 이슈를 통해 배우거나 느낀 점들, 꿈과 목표의 변화 과정 등'을 참고해 보자.

리우올림픽 에페 금메달 리스트 박상영

위 사진의 인물은 누구인가?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대한민국에게 감동의 금메달을 안겨준 박상영 선수이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펜싱 에페 종목에 결승에 진출하였고 10-14로 뒤지고 있을때 단 1점만 줘도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다. 그는 할 수 있다를 여러번 외치며 1점씩 따라가 결국 눈물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의 경기와 나의 인생을 빗대어 볼 때 비슷한 점이 많아 서두에 넣었다. 내 성장과정 스토리를 크게 유아동기, 10대, 20대로 나누겠다.

1. 유아동기 : 사랑을 듬뿍 받은 장손

어릴적부터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셨고 3남 2녀를 두셨다. 시대상에 따라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터라 대를 이을 자손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큰아버지 딸 , 둘째 큰아버지 딸 세명, 고모는 바깥식구, 마지막 막내인 아버지가 딸을 낳고 5년후에 나를 낳았다. 제일 큰 사촌누나와 나의 나이차이가 14살이니 강산이 한번 바뀌고 4년이 지난 세월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린 손자라 조부모님에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고 어딜 가나 이쁨을 차지했다.그래서 사촌들과 친누나에게는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나이차이도 많이 난 이유도 있겠지만 명절에 모이면 늘 소외되기 마련이였다.

할아버지는 교육자셨기 때문에 세뱃돈이나 졸업, 입학 시즌에 용돈을 주면 항상 차등을 두셨고 막내였던 나는 제일 금액도 적었다.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거기서 큰 불만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도 사촌들과 친누나와 서먹한 관계로 남았다. 어쨌거나 다행히도 조부모님의 사랑으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2. 10대 : 자존감의 끊임없는 하락

초등학교 입학후 3~4학년쯤 부모님 사이는 점점 안좋아지고 경제적 어려움이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교육자시기에 항상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성공해라고 하셨고 너가 우리집을 일으켜야한다.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늘 입에 달고 사셨다. 그때부터 나는 책임감, 부담감을 안고 살았던것 같다.

사춘기 시절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니 주변의 빈부격차, 가정환경의 차이가 보였다. 친구들은 나름 화목한 집안에 학원도 다니고 옷도사고 싶은것도 사고 가족여행도 가고 행복해 보였다. 내 기억으론 마지막 가족여행이 잠깐 부모님이 사이가 회복되었던 초5였던것 같다. 그 땐 공부도 잘하고 싶었고 학원에도 다니고 싶었지만 지원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가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나를 힘들게 했다.

부모님 사이의 중재가 되어야 했고 누나의 질투와 미움은 계속 됐다. 조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탈선하지는 않았고 주어진 환경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려고 노력했다. 특정 과목을 잘해 상장도 받아오고 나름의 성취는 냈지만 세상에는 극복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바로 돈이였다.

중3이 되서야 고등학교 진학에 있어 고민이 되었다. 나름 반에서 공부도 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인문계 진학을 하면 급식비, 보충수업비, 차비, 기타비용 등. 매일 돈 때문에 싸우는 집에서 내가 인문계를 가게되면 더 싸우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국비로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알아보게 되었고 졸업후에는 취직이 잘 되 돈을 많이 벌수있다 하여 원서를 넣었고 합격을 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정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였다. 타지역의 학교라 친구들과 지인들을 맘속에서 멀리 보내고 어린나이에 홀로 기숙사 학교로 진학했다. 군대식 생활에 처음에 좀 힘들고 적응이 되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내 자아는 너무 흔들렸다. 외롭기도 했고 왜 나는 돈 때문에 이 학교를 선택했고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

결국 고민 끝에 자퇴를 했다. 주변 가족들은 검정고시를 해라고 했지만 교육자셨던 할아버지는 손자가 고등학교라도 졸업하는 모습을 꼭 보고 하늘나라 가는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해서 나는 1년을 유급한채로 어린친구들과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 학교 갔을때는 너무 자존심도 상하고, 왠지 모르게 죄지은 기분이 들고 쪽팔리기도 했다. 1살 많으니 형인데 친구처럼 지내기도 쉽지 않았고 더 내성적이되고 자존감도 떨어지고 1학년 1학기 까지는 공부를 그래도 어찌해서 뒤쳐지지는 않았는데 학교 생활이 행복하지 않으니 1학년 2학기 부터는 보충수업이며 야자며 맘대로 생활하고 공부도 사실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3년을 지옥같은 생활을 보냈다. 수능을 치긴쳤지만 지방 사립대 나와서 취직이나 되겠냐며 원서조차 쓰지 않았다. 대신 영어라는 과목은 좋아했기 때문에 꾸준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도피성으로라도 외국에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알게 된게 워홀이였고 워홀가기전에 필리핀 어학연수를 하고 가면 언어 장벽도 낮아지고 더 괜찮은 잡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먼저 돈을 모으자라는 생각을 했다. 고3 졸업식 전에 나는 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벌었다.

3. 20대 : 밑바닥을 찍고 새로운 인생 시작

호주를 가기위해 부산에 가서 신체검사도 받고 비자까지 발급을 받았다. 돈 만 모으면 필리핀가서 영어공부를 하고 호주로 가면 도피성 외국 탈출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공장에서 알바를 하며 단기알바를 하는 친구와 눈이 맞았고 모든 내 인생이 연애에 맞춰지게 되었다.

필리핀 어학연수는 예약이 된 터라 3개월 동안 다녀왔다. 호주를 가야하는데... 결국 멍청하게 포기를 해버렸다. 가진 돈은 어학연수와 데이트 비용으로 써버렸고. 사랑에 눈이멀어 내 꿈은 2순위로 밀려났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끝에 수능을 다시 쳐서 어디라도 들어가야겠다.

그 때 나이 21, 수능까지는 5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공부를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처참했고 전문대 갈 수준 밖에 안됐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한번만 더 해보자! 다짐을 했다. 할아버지가 아프시기전 나를 은행에 데려가 본인이 가진 모든 준을 주셨다. 그 돈으로 다시 수능을 준비했다.

재수학원에 갈 만큼의 비용은 안되어서 독학재수 학원에 들어가 열심히 인강을 듣고 했다. 나름 돈을 썼기에 성적도 올랐지만 욕심이 화를 불러 수시에 너무 높은 곳에 지원을 했고 수능에서 예상보다 못쳐서 다 떨어지고 정시로 지방 사립대에 합격했다. 군대도 안가고 친구들은 제대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좌절의 연속이었다.

기쁨도 잠시 갑작스럽게 하반신 마비가 오게되었고 병명을 못찾은채 3주나 시간이 지체되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나였지만 원인 모를 병앞에 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처음 간 대학병원에서는 정신병이니 이상한 병명을 바꿔가며 못 알아냈다. 결국 지인찬스로 아산병원에 데이터를 가지고 갔고 10분만에 '횡단성 척수염' 이라는 100만명중에 3명이 걸리는 희귀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 약물 치료와 재활치료를 병행하면 많이 회복될거라는 아산병원 선생님의 말씀에 아버지는 원래 있던 병원으로 내려와 의사에게 전달했다. 그 의사는 처음에는 인정은 안했지만 사진촬영 한번 더 해보자며 말했고 따질것없이 촬영후에 바로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투여했다.

그 후에 감각이 살아나서 재활병원으로 옮겨졌다. 7개월 동안 휠체어, 워커, 지팡이 두개, 지팡이 한개, 마지막으로 내 스스로가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자 병원에서는 더 있어도 된다 했다. 그러나 나는 젊고 세상밖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빨리 퇴원해서 적응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퇴원후 세상에서 적응과정을 거쳤고 무엇을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하던 차에 하반신 마비로 인해 장애등급을 받을 수 있었고 장애전형으로 1년 반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 때 나이 24살이었다. 몸도 아프고 오래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허리도 아프고 매일 운동을 해야했다. 그렇지만 내 밥벌이는 내가 하자는 심정에 없는 돈을 빌려서 공부했다. 힘들었던 수험과정이었지만 합격이라는 기쁨에 모든것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을 해보니 월급은 박봉에 하는 일은 많고 일을 시작한지 1달 만에 코로나가 터져 업무에 코로나 업무까지 같이 하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하루종일 민원과 시달리고, 한달에 한번 당직근무, 2주~1달 장기차출 업무 내본연의 업무는 쌓여만 가고 이게 정말로 맞는 인생인가 회의가 들었다.

그렇게 2년을 근무하던 차에 몸에 이상이 왔고 휴직에 들어갔다. 그러다 전부터 이 월급으론 살 수가 없다라는 생각에 이직을 생각했었는데 공기업도 장애인 채용이 별도로 존재했다. 나는 그걸 또 레버리지로 활용하자! 라는 생각을 했고 치료와 공부를 병행하며 6개월의 휴직기간동안 합격을 했다.

복직을 하고 임용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자고 했다. 그러다 2022년 9월 자청님의 역행자를 읽게 되었다. 내게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60세까지 일하며 주식, 부동산 투자하며 집한채 가지는게 내 인생의 목표였는데 책과 글쓰기로 인생을 역전시키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다니 충격적이었고 깊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비난할 만한 사항들이 하나도 없었다. 몇년 전 부터 유튜브로 인증했고 여러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책, 블로그, 카페 다양한 곳에서 그의 능력이 보였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바뀌었다. 나도 자청처럼 인생을 바꿔보기로 몸이 아픈사람도 사업을 해서 성공해 꼭 세상사람들앞에 보란듯이 당당함을 보여주고 지독했던 가난을 벗어나보기로 그것이 나의 변화의 시작이었다.

블로그를 시작했고 책과 글쓰기, 라이프해킹스쿨, 클래스 101을 들으면서 요즘은 너무 돈벌기 좋은 세상인것을 깨닳았다. 학력, 환경, 다 필요 없다. 자신이 노력하고 가치를 생산해 내면 무조건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그동안 수많은 클루지에 갇혀 도전 조차 하지 않았던 나에게 분노와 열정이 불타올랐다.

책읽기, 글쓰기, 초사고 글쓰기 챌린지, 분노일기, 타이탄의 도구 모으기 나는 너무 바쁘다. 그렇지만 너무 행복하다. 이직한 이 직장에서도 빨리 벗어나려고 플랜까지 짜두었다. 인생의 모든 목표가 바뀌었다. 제 2의 자청+ 극복의 아이콘이 되보자!

많은 사람들은 환경이 어렵거나 몸이 아프면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없는 사람은 늘 없이 살아야하고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 해야하는게..

예전에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만이 성공의 공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글을 쓰며 느꼈다. 세상에는 고졸 출신 부자도 너무 많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아 세상이 주는 기회를 버리지만 않으면 무조건 된다고,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말고 밝은 미래를 보며 살아가자고 이것이 진짜 인생이라는것을 보여주자고 다짐했다.

내 목표를 경제적 자유를 이뤄 자유롭게 여행하고 시간을 쓸수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어릴적에 못해봤던 모든것을 해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인생을 즐기고 싶다. 그리고 나 처럼 힘든 사람들이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좋은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자기계발에 도움을 주기로했다.

책이라는 인생의 치트키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 나의 큰 목표중에 하나다. 세상에 못하는 것은 없다. 꿈꾸는 자는 모든것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