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막11:1~11)24.10.6일 원신선교교회 중국어예배
■원신선교교회의 주일예배 설교말씀을 정리하여 미리 올려주셨다. 목사님이 직접 카톡에 올리셨는 데, 정말 대단한 열정이다. 아래에 한국어와 중국어로...
■引言:
亲爱的弟兄姊妹,今天我们要从《马可福音》11:1-11中,来一起默想耶稣骑驴进耶路撒冷的事件。这个场景标志着耶稣在地上的事工即将进入高潮——受难周。众人手持棕枝高呼“和散那”,这是一个充满敬拜和期待的时刻。这个事件也在四卷福音书中都有详细记载,这让我们更加意识到它的重要性。
许多教会将这一天称为“棕枝主日”,它不仅象征着耶稣作为弥赛亚进入耶路撒冷,也预示着一段令人深思的旅程——他不是来迎接加冕为王的荣耀,而是为了走向十字架,完成救赎的伟大使命。
今天我们不仅要回顾这一历史性事件的表象,更要深入理解它背后的属灵意义。耶稣为何要选择骑驴进入耶路撒冷?这与他弥赛亚身份有何关联?众人的反应又反映了他们对弥赛亚的期盼有怎样的偏差?更重要的是,这个事件如何向我们揭示耶稣的使命与他带给世人的和平?
第一点:话语的可信——圣经预言的应验与成就
耶稣骑驴进耶路撒冷的行为不仅是一时的举动,更是对旧约预言的直接应验。撒迦利亚书9:9清楚地预言了:“锡安的民哪,应当大大喜乐,耶路撒冷的民哪,应当欢呼!看哪,你的王来到你这里!他是公义的,并且施行拯救,谦谦和和地骑着驴,就是骑着驴的驹子。”这个预言在耶稣的行动中得到完全的应验。
这不仅让我们看到耶稣作为弥赛亚的身份是预言成就的证明,也让我们更加坚定对圣经话语的信心。神的应许从不会落空,他所说的每一句话都会在其时间内实现。圣经不仅是过去的历史,它也是神在当下与未来不断显现的真理。耶稣应验了旧约预言,他同样也会应验所有关乎末世和他再临的预言。
我们今天所拥有的圣经,是神无误的话语。它见证了历史,也为我们指引未来。旧约的每一个预言,都在新约中得到成就和显明;新约的每一个应许,都指向神在我们生命中即将实现的计划。当我们阅读圣经时,我们不仅是在阅读一个古老的文本,更是在与那位创造宇宙、掌管万有的主相遇。今天,神借着圣经向我们启示他永恒不变的计划。
因此,耶稣骑驴进耶路撒冷这一事件提醒我们,信仰的基础是对神话语的信靠。圣经无误论让我们坚信,神说的话语真实可信,所有的预言都会成就。因此,当我们相信耶稣第一次应验了弥赛亚的预言时,我们也应坚信他必然会按照圣经所说的那样,驾云再临,完成他的救赎计划。我们不单相信他曾为我们降生,我们更期待他荣耀的再来。
第二点:众人的渴望——弥赛亚的误解与盲目期待
当耶稣进入耶路撒冷时,众人纷纷手持棕枝,高呼“和散那!奉主名来的是应当称颂的!”这场面是热烈的,充满了对弥赛亚的渴望与期盼。但我们需要深入思考的是,这些人对耶稣的欢呼,究竟基于怎样的认识?
当时的犹太人长期生活在罗马帝国的压迫和统治之下,他们渴望一位强有力的政治领袖带领他们推翻外邦人的统治,重建大卫王朝。他们期待弥赛亚是一个“拯救者”,但这种“拯救”更多的是政治和经济上的。他们对耶稣的赞美与欢呼,反映了他们对一位政治性救主的误解。他们以为耶稣要带来地上的国度,建立他们心中所期盼的政治胜利。
但正如我们从后来的事件中看到的,这些人的期望很快落空了。当他们意识到耶稣并不打算推翻罗马政权时,他们的态度迅速改变,甚至有些人从“和散那”转为“钉他十字架”。这揭示了他们的信仰基础是何等浅薄,甚至是基于个人利益的。
今天,我们对耶稣的期盼又是什么?我们是否也是因为个人的需求和愿望,而将耶稣视为“问题解决者”或者“生活祝福者”?还是我们真正认识到他是那位带来属灵救赎的主?他所成就的,不是地上短暂的政治胜利,而是永恒的救赎与和平。当我们高呼“和散那”时,我们是否真的明白自己在宣告什么?我们是否期待的是那位带来永生的弥赛亚,而非满足我们短期欲望的强者?
我们需要从这群人的反应中学会反思自己的信仰基础。耶稣并不是来满足我们在世上短暂的需求,他来的目的是更深远的——要解决我们灵魂深处的问题,带来与神之间的和好。我们今天欢呼的是一位和平之君,还是仅仅期待他成为我们人生中的“护航者”?愿我们深刻反思,并在信仰中清晰认识到耶稣的真正使命。
第三点:耶稣的使命——成就和平的救主
耶稣骑着驴驹进入耶路撒冷,不仅是一种谦卑的表现,更是他来成就和平的象征。根据当时的习俗,君王如果骑马进入城池,意味着他是带来战争与征服的征服者;但骑驴则象征着和平。耶稣选择骑驴,是在明确地传达他作为和平之君的使命。
《西1:20》清楚地告诉我们:“既然借着他在十字架上所流的血成就了和平,便借着他叫万有,无论是地上的、天上的,都与自己和好了。”耶稣的和平,不仅是社会秩序上的和平,而是更深的属灵和平——通过十字架,他要将人与神之间因罪而隔绝的鸿沟填平。这是一种无比深刻的和平,是一种带来属灵自由与和好的和平。
耶稣并不是要通过强权或者财富来建立他的国度。他的国度是属灵的,是永恒的。这国度的入口,就是十字架。耶稣的使命从来都不是带来一时的政治革命,而是通过十字架成就真正的和好。他来是为了解决人与神之间因罪而产生的隔离,通过他的牺牲,将罪人带回到圣洁的神面前。保罗在《林后5:18》也指出:“一切都是出于神,他借着基督使我们与他和好,又将这和好的职分赐给我们。”
十字架上的耶稣所成就的,不仅是一个历史事件,而是一场永恒的拯救行动。通过他的死与复活,我们得以与神和好,恢复了原本被罪破坏的关系。这种属灵的和平,远超人类所能理解的政治和平。它是一种彻底的、内在的和解,是人与神、人与人之间的和好。
因此,耶稣骑驴进入耶路撒冷,不仅向我们展示了他是那位应许的弥赛亚,也向我们揭示了他使命的真正意义。作为基督徒,我们不仅要欢呼他是那位和平之君,更要领受他在十字架上所成就的和平,活出这种和平,并将这和好的信息传递给他人。
结论:
亲爱的弟兄姊妹,今天我们从耶稣骑驴进入耶路撒冷的事件中,看到了一幅深刻的画面。首先,这让我们看到神话语的真实与可信。圣经的每一字每一句,都是神为我们预备的救赎计划,它无误、可信。其次,我们看到众人对弥赛亚的渴望与误解,提醒我们要正确认识耶稣——他不是一个满足短暂需求的政治领袖,而是为我们带来属灵救赎的主。最后,我们看到了耶稣的使命,他来不是为了地上的胜利,而是通过十字架,成就与神的和好。
今天,当我们高声呼喊“和散那”时,让我们清楚认识我们所赞美的是谁。他是那位带来真正和平的王,他通过十字架成就了我们与神之间的和好。愿我们在他带来的和平中生活,并将这和平带给他人。让我们从内心发出最真诚的呼喊:“和散那,奉主名来的是应当称颂的!”阿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성경 본문: 마가복음 11장 1절부터 11절
서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1장 1절에서 11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절정에 다다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을 상징합니다.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외치는 이 순간은 예배와 기대가 가득한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많은 교회가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며,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가 영광의 왕관이 아닌 십자가를 지기 위해 걸어가신 구속의 여정을 미리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의 표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영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이것이 그분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이 메시아에 대해 어떤 잘못된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님의 사명과 그가 세상에 가져다주신 평화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첫 번째 요점: 말씀의 신뢰성 - 성경 예언의 성취와 완성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행동은 단순한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구약의 예언을 직접적으로 성취한 사건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이렇게 명확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예언은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정해진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과거의 역사적 기록일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리와 계획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으며, 그는 또한 모든 종말과 재림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역사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길을 제시합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신약에서 완성되고 나타났으며, 신약의 모든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루실 계획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단순히 오래된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그의 영원한 계획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 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모든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첫 번째 메시아의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믿는 것처럼, 그가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오셨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 요점: 사람들의 열망 - 메시아에 대한 오해와 맹목적 기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장면은 열정적이고,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그 기초가 무엇이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압제와 통치 아래 살아왔으며, 그들은 강력한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 그들을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구원자로 기대했으며, 예수님에 대한 찬양과 환호는 그들이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줄 메시아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왕국을 세우고 정치적 승리를 이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으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산나"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태도로 급변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얕았는지를 보여주며, 그들의 신앙이 개인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을 반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한 개인의 필요와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문제 해결사로, 혹은 인생의 축복자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임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단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 깊숙한 곳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호산나"를 외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선포하고 있는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강한 자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무리들의 반응에서 우리의 신앙 기반을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일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더 깊은 곳에 있으며, 이는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이 진정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우리 인생의 "도움자"로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깊이 반성하며, 예수님의 참된 사명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요점: 예수님의 사명 - 평화를 이루신 구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단지 겸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가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왕이 말을 타고 성에 들어갈 때는 전쟁과 정복을 의미하지만,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분명히 전하고 계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평화는 단순한 사회적 질서의 평화가 아니라, 더 깊은 영적 평화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해 죄로 인해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매우 깊이 있는 평화이며,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평화보다 훨씬 더 큰, 영적인 자유와 화목을 가져다주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강압이나 부를 통해 그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화목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고, 이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며 따라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평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평화를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져다준 화평은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주며,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삶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는 영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이기심과 불화를 극복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참된 화목을 이루게 합니다.
결론: 우리의 반응 - 참된 평화의 왕께 드리는 찬양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사건은 그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의미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입성을 통해 성경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항상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 삶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그들의 기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영적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대는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가요? 우리는 그의 참된 사명과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구원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셋째, 예수님의 사명은 화평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받아들이고 그 평화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호산나"를 외칠 때,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참되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삶과 영혼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평화 안에서 살아가며, 그분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