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플랜 C

"어서 움직이게!"

추위는 완전히 사그라들고, 이제는 따사로운 봄볕이 뺨과 머리칼을 데우는 시기가 찾아왔다. 꽃가루의 간질거림, 햇빛의 따뜻함을 살포시 밀어내는 듯한 은은한 바람은 사람을 금방 느긋함의 병에 사로잡히게 하기 충분했으나, 그런 와중이었음에도 어째서인지 어딘가의 보도를 내달리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느긋함, 나긋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바쁜 달음박질은 또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를 함께 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서야 겨우 입장하게 되고 마네. 좀 더 빨리!"

주변의 시선이 잠깐이나마 집중될 정도로 요란하게 달리는 두 명 분의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서 한 명, 우마무스메 특유의 쫑긋 솟은 귀를 바람에 폴폴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올라와 있었으며 자신의 뒤에서 힘겹게 달려나가고 있는 한 사람을 보며 음험하게 눈꼬리를 휘어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장으로선 썩 복장이 뒤집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녀, 아그네스 타키온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흐리멍텅한 눈이 흔들리는 경우는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그나마도 (그녀 기준으로)총애하는 연구 동료인 맨하탄 카페가 본의 아니게 설치한 커피의 덫에 빠져버렸을 때 이외에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급하게 걸음을 옮겨야 할 정도로 중요한 행사가 있음에도 그녀는 그저 현재의 촉박한 상황이 그저 재미날 뿐이었다. 정작 그녀와 함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내달리고 있는 트레이너는 죽을 맛인데도 말이다.

"비라도 쏟아졌다면 5분 가량의 지연을 기대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 참 야속하군 그래. 이리도 날씨가 쨍쨍하니 말일세. 그렇지 않은가?"

그녀가 조금만 더 일찍 기상했더라면, 트레이너의 흔듦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텐데. 뻔뻔하게도 그녀는 트레이너에게 일절 사과의 말을 건네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괜시리 트레이너를 탓하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은 자신의 탓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인걸까. 헤실헤실 웃음을 지으면서도 시시때때로 그 눈동자를 굴려 트레이너를 힐끔 쳐다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눈치가 아주 없는 것은 또 아닌 듯해보이기도 했다.

10분, 아니 5분만 일찍 잠들었더라면. 수면 시간을 아껴가며 약물을 조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힘겹게 달릴 필요도 없었을텐데. 트레이너는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그마한 역정 이상의 감정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고, 그녀를 알아온 시기가 짧았더라면 심술이 솟았겠지만, 지금의 트레이너는 달랐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는 우마무스메를 알아왔기에, 당장 느껴지는 것이라곤 팔자에도 없는 전력질주를 해내느라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의 아픔 뿐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달려간다면, 계산이 맞다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앞지르며 골-!! 봄 천황상의 영광을 손에 쥔 우마무스메는 바로 맨하탄 카페였습니다!!]

"...아, 이런."

우뚝. 경기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열정 가득한 스피커 소리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타키온은 가만히 두 눈을 끔뻑이며 귀에 꽂히듯이 울려퍼지는 중계 소리와, 바깥에서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피식 하고 짧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자신과 트레이너가 빼도 박도 못할 지각생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각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가 귀를 쫑긋 세워가며 포착한 소리는, 다름 아닌 시끄러운 스피커 소음의 가운데에 끼어있는 '맨하탄 카페' 라는 말이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시종일관 웃기만 하던 타키온의 표정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 기준으로) 친구의 경기를 관람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타키온은 이윽고 고개를 느릿하게 가로저으며 트레이너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음흉함 어린 미소가 얼굴에 떠올라 있었지만, 아주 조금은 다른 감정이 섞여있는 것도 같았다.

"이 소리가 들린다는 건, 대략 20분 가량의 대기 후에 위닝 라이브를 시작한다는 뜻이겠군."

자그마한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트레이너와 눈을 마주한 채로 느지막히 뒤이었다.

"...경기는 보지 못했지만, 대기실에라도 가보는 건 어떤가?""

...

"걱정 말게. 내 이름을 댄다면 카페도 분명 나와줄걸세. 영광스러운 1착을 달성했으니 그녀 또한 기분이 괜찮을테고 말이지."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 타키온과 트레이너는 조금 전의 소란스러움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한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 지나가고 있었다. 일반인은 본래 복도에 들어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지만, 타키온의 억지에 가까운 설득 끝에 경비를 설득시켜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 사실, 그녀의 설득보다는 이야기를 듣다 지친 경비가 여러 번의 통화 끝에 맨하탄 카페와 직접 연락한 끝에 이루어진 출입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지. 카페가 우릴 반겨준다면 좋으련만."

그녀의 말에 따라, 트레이너와 타키온은 맨하탄 카페의 대기실로 향했다. 타키온의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2-B호실 내에서 맨하탄 카페는 격렬한 경기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땀에 젖지 않은 또 하나의 승부복으로 환복하여 위닝 라이브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고요한 복도를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내어가며 걸어나갔고...

"......아이쿠."

우측으로 꺾자마자,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두 사람을 멈춰서게끔 만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뜩한 검은색으로 자신을 치장한 우마무스메.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드러나는 손과 얼굴만큼은 새하얀, 인형을 연상케 하는 우마무스메가 자신들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이게 누구야. 내가 총애하는 카페가 아닌가.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주다니."

"그리고 트레이너 씨까지."

맨하탄 카페는 정면의 트레이너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건네었다. 타키온은 한순간 당황한듯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태도를 다시 여유롭게 바꾸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을 맞이한 카페의 표정은 결코 밝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불편해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늘이 들어찬 카페의 목소리에, 트레이너는 자신이 직접 앞으로 나와 방문한 목적을 설명하려 했으나, 이내 아래에서 올라온 타키온의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타키온의 고개가 느긋하게 돌아가 카페를 올려다보았다.

"이유랄 것이 있겠나. 카페의 달리기를 보고 싶었을 뿐이네. 그게 나쁜 건 아니잖나?"

"......"

"그렇지만, 참으로 아쉽게 되었어. 우리가 들은 것은 기껏해야 카페의 1착 소식 뿐이었네. ...허나, 그렇다 해서 아무 말도 없이 떠나는 건 암만 그래도 정없는 행동이 아니겠나. 그래서 이렇게 조금의 억지를 부려서까지 찾아온 걸세."

평소대로,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타키온. 곧이어 그녀는 잠깐의 뜸을 들이는 듯 싶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고...

"카페, 축하하ㄴ..."

"안 오시는 편이 좋았을텐데요."

맨하탄 카페는 단호히 타키온의 말을 끊었다. 타키온은 잠깐 말문이 막힌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이 이상 막지는 않겠지만, 더는 찾아오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이에요."

카페는 트레이너를 잠시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타키온과 눈을 마주한 채로 뒤이어 말했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타키온을 향해.

"이젠 몸도 성치 않으신데, 굳이 이렇게 찾아오실 필요는 없잖아요."

언제였던가. 머리가 좋기로는 유명한 타키온조차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머리를 쥐어짜내어 생각해내려 할 때면, 언젠가 있었던, 언젠가 겪었던 언젠가의 뼈 아픈 고통만이 선연히 그녀의 가슴을 짓이기려 들었다. 카페의 메몰찬 말을 들은 타키온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능글맞게 웃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있었다. 곱게 다림질된 트레센 학원의 교복이 흉하게 구겨졌다.

언제였던가. 어느 순간부터 달릴 수가 없게 되었다. 허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꽂힌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가 선천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한계에 부딪혀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처지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하고 계산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의 허용 범위를 상정해가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건만...

"보자마자 나쁜 말을 해서 죄송스럽지만... 저도, 당신도, 이렇게 서로를 보면 괴로울 뿐이잖아요."

부러지고 말았다. 다른 어떤 상황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동공의 빛이, 비로소 골절의 순간에 찾아와 타키온의 눈을 밝혔다. 처음으로 이성이 아닌 순수한 고통에, 좌절감에 비명을 질렀다.

다음 경기만 나가고 그만둬야지. 한 경기만 더 하고 정말로 그만둬야지. 봄철의 경기만 마무리한다면 그 때는 정말로 끝내는거야.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두어 걸음 씩 추가되어오던 그녀의 계획이, 바보같이 점점 커져가기만 하던 목표가 단숨에 무너진 것은 그 때의 일이었다. 타키온의 머리와는 달리, 다리는 이미 한계의 한계에 봉착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서러움에 복받쳐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경기를 뛸 수 없는 몸이 된다 한들 트레센 학원의 학생이라는 신분을 강제로 뺏기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녀는 혼자 다닐 때에는 목발을, 누군가를 대동할 때에는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말이다. ... 그리고는 그 상태로, 자신의 마지막 꿈이 될지도 모를 봄 천황상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론 훌륭하게 우승한 맨하탄 카페에게 축하의 한 마디밖에 전할 수 없게 되었지만.

"...레이스에는 아예 손을 떼셨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늦었지만, 괜찮으시다면 조금 뒤의 라이브에도..."

"아니, 라이브는 볼 생각이 없네."

타키온의 단호한 한 마디에, 카페는 별다른 불만을 내뱉지 않고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틀어쥐고 있던 제 가슴팍을 놓은 채였고, 카페를 올려다보며 은은하게 양 입꼬리를 휘어올리고 있었다.

"봄철의 가장 큰 경기에서, 카페 자네가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됐지. 비록 그 모습을 관람석에서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오늘의 방문 목적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네. 그러니, 굳이 위닝 라이브를 보러 갈 필요까지는 없다 판단했지."

"또 이상한 말씀이나 하시네요. ...그 목적이라는 건 뭔가요?"

"그것보다도 먼저, 모르모트 군? 그것을 꺼내주게."

타키온은 트레이너를 돌아보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마치 짜고 치기라도 한 듯이 트레이너는 어깨에 걸치고 온 크로스백에서 자그마한 보온병을 꺼내어 카페에게 건넸다. 영문도 모른 채로 타키온과 트레이너를 번갈아보던 카페의 손에는, 어느덧 그 보온병이 덥석 들려졌다. 그제서야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건, 그건 꼭 전해주고 싶었다네."

"이게... 대체..."

"에너지 음료라네. 내가 직접 만들었지."

타키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페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졌다. 마치 '이걸 왜 나한테 줘요.' 라고 말하듯, 그녀는 은근히 트레이너를 쏘아보았다. 은근하면서도 대놓고 트레이너를 째려본 탓에 단박에 흥미로운 기류를 눈치챈 타키온은 얼굴에 흐뭇한 웃음을 띄우며 숨을 들이키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나도 수십 번 이해하는 바네. 허나, 이런 경사스러운 자리에서조차 못된 장난을 칠 정도로 내가 독한 사람은 또 아니라네."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요. ...도로 가져가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을 생각이죠?"

"아, 물론이지. 그러니 웬만하면 그 선물을 받아주었으면 하네. ... 다른 누구도 아닌, 그건 그대와... 나를 위한 선물이기도 하니."

불신으로 가득 차있던 카페의 표정에 일말의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평소의 타키온이었더라면 절대 입에 담을 것 같지 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들린 보온병과 타키온을 번갈아 보았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한참동안 입을 우물거리다가 겨우 입술을 열었으나... 다시금 말을 꺼낸 것은 타키온 쪽이었다.

"내 몸은 이제 틀렸어.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더 이상 달리는 것은 커녕 멀쩡히 걷는 것조차 심호흡을 거쳐야 할 지경이 되어버렸지. ...우마무스메의 한계를 내 다리로 직접 확인하려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휠체어에 앉게 되어버렸지 뭔가."

타키온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다리가 망가지기 전에 으레 해왔던대로 다리를 꼬아보려 했으나... 이내 '끙.' 하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늘어뜨리듯 제 몸을 휠체어에 기대었다. 허탈한 코웃음과 함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이미 일어난 일에 울분을 토할 마음은 없네. 이런 일을 위해 미리 또 하나의 계획을 과거에 짜놓았지. ...비록 그 계획 중 하나인 '경기를 직접 관람한다.' 가 살짝 어그러지고 말았지만 말일세. 결론만 보자면 반절 가량의 성공인 셈이지."

"...아까부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거예요?"

"...모르모트 군, 잠깐만 놓아주게."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혼란스러워보이는 카페를 올려다보며 타키온은 휠체어의 바퀴를 스스로 끌어 그녀의 눈 앞까지 다가갔다. 서로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니, 올려다보는 사람과 내려다보는 사람이 좀 더 확실히 나뉘어지는 것만 같았다. 목이 아파올 정도로 높게 카페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타키온의 표정에 짧게나마 수심이 들어찼다.

그리고는 잠시 후, 타키온의 두 손이 앞으로 뻗어지는 듯 싶더니 카페의 손을, 보온병이 쥐어진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놀란 마음에 내려다보는 카페와는 달리, 타키온의 고개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카페.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 사실 이 말을 위해 지금껏 하잘것 없는 설명을 덧붙인 것일테지."

"......?"

"이제부터 나는, 나의 꿈을 완전히 놓아주려 하고 있네. ...그리고, 그대로 붕 떠버린 그 꿈을... 카페, 자네에게 멋대로 떠넘기고자 한다네."

"꿈...이라구요?"

"더 달리고 싶었어."

늘 해내던대로, 능글맞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의 타키온은 조금 달랐다. 쉽사리 알아챌 수는 없었지만... 말소리의 끝자락이 엷게 떨리고 있었다.

"허나 내 몸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지. ...그렇지만 카페, 자네는 달라. 자네라면... 분명 최고가 될 수 있어. 우마무스메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어. 바로 옆에서 함께 달리던 나의 안목이니, 틀릴 일은 없을걸세."

말을 멈춘 타키온의 몸이 깊은 심호흡으로 인해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그렇게 두어 번의 깊은 호흡이 이어진 뒤에야 그녀는 다시금 뒤이어 말할 수 있었다.

"자네에게 걸고 싶네. 자네, 맨하탄 카페라는 이름의 우마무스메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간접적으로나마 나 자신을 완성시켜주었으면 한다네. ...터무니 없는 제안이란 것 쯤은 이미 알고 있어. 그렇기에 앞서 '멋대로 떠넘기고자' 라는 말을 굳이 덧붙였던 것이라네. 그저 내 욕심을 위해 자네의 어깨에 부담을 주려는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부탁이지. ...선물이랍시고 전해준 음료는... 그 욕심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네."

타키온은 일시적으로 말을 마치며 고개를 들어 카페를 올려다보았다. 카페의 눈에 비친 타키온의 얼굴에는 우스울 정도로 눈물 한방울조차 맺혀있지 않았지만, 서글프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선 적이 있었던가. 카페는 지금껏 본 적 없던 그녀의 모습에 미처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로 표정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중, 타키온이 먼저 카페의 손을 놓고선 바퀴를 굴려 거리를 두었다.

"...이런 나의 음험한 계획을, 자네를 이용하려는 그 생각을 지지한다면... 그 음료를 받아주게. ...그것이 나의 플랜 B라네."

회한이 담긴 듯한 목소리. 카페는 가만히 자신의 손에 들린 보온병을 바라보았다.

"소량의 카페인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자양강장을 위한 성분만을 넣었다네. ...만약, 조금이라도 탐탁치 않은 구석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돌려줘도 좋네. 굳이 마시라고 강요하지는 않을테니."

이 이상은 전할 말이 없는지, 타키온은 바닥을 내려다본 채로 오묘한 허무감에 짧은 헛웃음을 연달아 흘려내고 있었다.

돌고 돌아, 그렇게 열심히 달린 끝에 해낸다는 것이 고작 에너지 드링크를 만들어 선물하는 것이라니. 지금껏 성공에도 기뻐하지 않고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지금만큼은 사무치는 허무함에 웃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마음만큼은 어째서인지 후련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부탁이었지만... 이제서야 전부 내려놓은 것 같았기에. 이제서야 자신이 달리지 못하는 우마무스메가 되었다는 걸 온전히 실토한 것 같았기에.

그리고, 한참동안의 정적이 이어지고나서야... 카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이브는..."

"? 뭐라고 했나?"

"라이브는... 보러 올 생각이 없다고 하셨죠?"

"그랬...었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카페는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타키온의 대답을 듣더니... 대뜸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젖히곤-

"?! 카페, 이게 무슨..."

벌컥, 벌컥.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의 기세로 검증조차 되지 않은 타키온의 음료를 목 너머로 삼켜넘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카페의 행동에 타키온은 당황하여 답지 않게 말끝을 절어댈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잠시 후, 카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입에 댄 보온병을 떼내었다. 크게 맛이 있지만은 않았는지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로.

"...여전히 맛을 내는 데에는 소질이 없으시네요. ...그럼 저는 라이브 준비를 해야 돼서..."

그 뒤, 카페는 병을 든 채로 타키온과 트레이너에게서 등을 돌려 메몰차게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에, 타키온은 연신 트레이너와 카페의 등을 번갈아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어 해낸 말이라는 것은...

"카... 카페, 방금의 그건... 무슨 뜻인가?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네. 적어도 대답이라도 해주고 돌아가게나...!"

혼란이 가득한 타키온의 목소리. 외침에 가까운 그 소리를 듣고서도 카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단호한 걸음을 또각, 또각 걸어나가며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이듯 대답할 뿐이었다.

"칼리굴라 효과예요."

적막하고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카페의 마지막 한 마디. 그리고는 그 직후, 대기실의 문을 여닫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는 진정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타키온은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마냥, 휠체어에 늘어진 채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굴라..."

트레이너가 말없이 찾아와 휠체어를 붙잡아줄 때까지, 그녀는 카페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곧이어 끼릭- 하고 바퀴가 천천히 돌아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타키온은 주변의 풍경이 느릿하게 바뀌는 것을 한참이 지나고서야, 실외의 햇빛이 눈을 때린 뒤에야 겨우 알아차리며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눈치채지 못했건만. 봄철의 공기와 햇빛이 이렇게나 뜨거웠던가. 그녀는 제 손을 이마에 대어 그늘을 만들고서야 겨우 눈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따귀를 때리듯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끔 하는 햇빛이었지만, 그런 볕을 한참을 쬐고서도 그녀의 굳게 닫힌 입은 쉽사리 열릴 생각을 않았다. 평소라면 쉴틈 없이 트레이너에게 말을 걸어가며 시간을 죽이거나 했을텐데.

"......금지된 것에 더욱 끌리는 심리적 현상이라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신호등 앞에 휠체어가 멈춰섰을 무렵, 타키온은 앞뒤 맥락을 모두 잘라낸 한 마디를 건네었다. 얼핏 평소와 하등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내게, 맛을 내는 데에 소질이 없다고 말했었네."

신호등이 파란불로 변하고, 트레이너는 조용히 그녀의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들어주며 휠체어를 밀어가며 앞으로 향했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도로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는 그녀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어진 우마무스메 전용 도로였다. 현재는 아무도 달리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기만질에 불과한 계획이라 생각했거늘. ...카페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 모양이야."

...

어쩌면, 타키온은 처음부터 자신의 플랜 B를 스스로 곡해해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뜻을 전하며, 자신의 스러져버린 꿈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드링크를 건네어주는 일련의 과정이... 그녀 스스로에게 있어 내심 부끄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이루지 못한 꿈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일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이 다리를 혹사시켜가며 실험에 몸을 바쳤던 그 후회스러운 일생을 다른 이에게 강요한다 생각했었다. 철저히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제삼자의 입장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려 했건만, 애초부터 그녀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계획, 뜻을 전하며 소소한 선물을 건네는 그 과정이... 타인에게 있어선 자그마한 응원의 한 마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배제한 채로.

타키온은 자신이 틀어쥔, 구겨져버린 교복의 가슴깨를 툭툭 두드려 어설프게나마 펼쳐내며 말을 이었다.

"...졸업 후에는... 사업을 해볼까 싶네."

횡단보도를 모두 건너자마자 들려온 타키온의 갑작스러운 말에, 트레이너는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로, 우마무스메 전용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이 도로를 연습 삼아 달리게 될 모든 우마무스메를, 나의 모르모트로 삼고 싶어졌다네. 내가 직접 구상하고 배합한... 나만의 화학적 결과물로."

휠체어의 팔걸이에 힘없이 올려졌던 그녀의 두 손이,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밀어주고 있는 트레이너를 올려다보았다.

불안감이 서려있는 그녀의 눈빛.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입가에는 어딘가 후련해진 듯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자신이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한심한 우마무스메가 아님을 뒤늦게 깨닫기라도 한 양, 타키온의 표정은 새로운 긴장과 새로운 생각이 엮어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조군과 실험군은 많을 수록 좋은 것 아니겠나. ...내가 달릴 수 없다면, 다른 이에게 달릴 힘을 주는 것이 옳은 길일테고 말이야. 카페의 말대로, 음용 시에 느껴지는 맛에 조정을 가한다면 누구라도 부담없이 그 에너지 음료를 마실 수 있을걸세."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에 몸을 맡겨 말을 이어나가고 있는 타키온은 과연 들었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쳐다보고 있던 우마무스메 전용 도로의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누군가의 달음박질 소리를.

"당장 돌아가서, 최고의 음료를 배합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세...! 아, 아... 광고를 만들게 된다면 모델은 카페를 밀어주고 싶다네. 자그마한 육감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연기에도 소질이 있어보이니... ...아, 그리고, 그리고... 아직 계획조차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지만... 생각을 멈출 수가 없구먼."

그녀가 달릴 수 없게 된 몸이 된 이후로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들뜬 목소리. 한없이 낮은 가능성에 대한 즐거운 의견을 건네며 웃음짓는 이 표정을 내보인 것이 얼마만이던가. 타키온은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 둘 꼽아가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설레발이더라도... 나도 모르게 떠오른 광고 문구를, 한 번 들어보지 않겠나? 짧으면서도, 나의 염원이 담긴 한 마디일세."

트레이너를 올려다보며 즐겁게 재잘대는 타키온의 옆, 우마무스메 전용 도로를 내달리는 달음박질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심장박동 소리마냥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의 근처까지 다가왔으며, 이윽고 한 명의 이름 모를 우마무스메가 그 두 사람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