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
원신 - Genshin Impact
원신은 중국 게임의 상징이다. 이제 중국이 한국보다 게임을 잘 만든다는 근거를 들 때 원신은 가장 먼저 꼽힌다. 녹색 날치알 초밥 같은 게임이나 양산하던 중국이 어느새 우리나라보다 게임을 잘 만든다고 하니 과연 비뚜름한 마음이 생길 만도 하다. 이러한 질척한 마음과 호요버스의 업보가 얽혀 널리 통용되는 원신의 별명이 표절 게임일 것이다. 찬반양론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에 원신은 너무 멀리 와 있다. 심지어 지금도 그 악명을 찬찬히 쌓고 있는 중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요는 원신이 중국 게임 답지 않게 잘 만든 게임이고,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나에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나에게 묻는다면 원신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단어는 그저 과금 게임이다. 그저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콘솔 게임을 오랫동안 즐겨온 게이머에게 소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금 게임의 개념은 여간 생소한 것이 아니다. 콘솔 게이머라 하면 연식이 오래될 수록 까다롭고 인색하기로 왼 편에 세울 자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게임은 초기 투자비를 제외하면 합리적인 예산으로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신비한 취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금 게임이란 것들이 돈을 갈취하는 기세를 열량으로 환산하면 바다를 증발시키는 경지라 하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신기할 일은 아니다. 거부감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정도가 지나쳐 본인이 구매한 게임의 가격이 떨어지면 그 차액이 아까워 제작사를 공격하는 유사 주식 투자자들에 이르면 이와 같은 형태의 게임은 외도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허나 시대는 변해 콘솔 게이머의 구매력은 나날이 저하되고 있다. 게임 가격이 만원만 올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는 궁상맞은 콘솔 게이머들을 내버려두고 게임 제작사들은 새로운 시장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사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은 언제나 힘든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콘솔 게이머에게도 마찬가지다. 과금 게임에 거부감을 가진 그들은 곧 자기합리화를 시작한다. 어차피 과금 게임의 단순한 구조는 나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게임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높기 때문에, 저 수준 낮은 놀이에 한 발 걸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과금 게임은 제대로 된 게임이 아닐 것이라는 비틀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금 게임 제작사들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최근에도 모 회사에서 발매한 정신없이 흔들리는 엉덩이로 영업하던 과금 게임의 인기가 세계로 뻗어나가더니, 기괴하게 가슴을 어필하던 동사의 게임이 서비스 종료를 발표했다. 전연령 게임 캐릭터의 엉덩이에 굳이 문어를 장착하는 외도 게임 크리에이터가 용기있는 디렉터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렇다. 과금 게임은 제대로 된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해볼 필요가 없다. 표절 게임이란 악명까지 붙은 원신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경험해보지 않은 게임에 대해 말을 얹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없다. 시간 낭비를 넘어 음침한 이야기다. 업계에 기여할 생각이 없다면, 원신에 관심이 없다면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뿐이다. 그리고 나는 여느 게이머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무척 시끄러운 편이다. 손가락을 놀리지 않으면 가시가 돋치고 굳은 살이 배긴다. 그런 사람이 원신에 대해 이야기고 싶다면 그 게임을 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 원신이 어떤 게임인지, 원신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플레이어의 이야기가 옳은지, 내 친히 알아봐야 겠다. 알고 있다. 지금 나는 스스로 뭐라도 되는 것처럼 거만하다. 어떤 게임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처럼 아무리 하찮아도 상관없다.
초반 장벽을 넘기 위해
사실 나는 이 게임을 발매 직후에 플레이했다. 일본 게임을 즐기는 사람 치고 이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을 거라 생각한다. 원신은 발매 전부터 화제가 끊이지 않는 게임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세상에 다시 없을 게임으로 추앙받던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하 BoW)의 아트워크와 탐험 시스템을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참고했다면 어떤 게임이라도 십자포화를 받았을 것이다. 이상한 부분에서 자존심을 챙기는 콘솔 게이머들이다. 고작해야 BoW 카피 게임에 지나지 않는 원신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봐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편견으로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원신의 초반부는 실제로 콘솔 게이머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얄팍하고 어색할 뿐이다. 세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기에 탐험에 대한 동기 부여가 부족하다. 여기서 BoW의 시스템을 제대로 표절하지도 못한 것이 그대로 단점으로 연결된다. 무엇보다 스태미너가 부족해 불쾌하다. BoW에서 부여하는 스태미너의 제약은 분명 모험의 혹독함과 이를 극복했을 때의 희열을 표현하기 위한 스트레스로 기획했을 텐데, 원신에는 그 많은 제작 의도 중 스트레스만 남아있을 뿐이다.
전투에 돌입하면 이러한 얄팍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적의 공격을 몇 번 피하고 나면 스태미너가 부족해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게 된다. 그 와중에 회피에서 대시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나 모션이 니어 오토마타를 똑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거의 사소한 일로 느껴질 정도다. 애초에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액션이 많지 않다. 공격은 너무 느리고, 스킬은 쿨타임이 무시무시하게 길다. 초필살기는 제대로 쓰지도 못할 정도인데, 이를 극복하고 사용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것도 아니다. BoW에서 세계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각종 물리 현상들도 심드렁할 뿐이다. BoW와는 달리 탐험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까닭이다.
시나리오를 전면에 내세우는 JRPG로써도 무척 실망스럽다. 대사는 대책없이 길고 텍스트를 다 읽었는데도 원하는 시점에 스킵할 수 없어 템포가 아주 좋지 않다. 내 동료로 들어온 캐릭터는 완전히 없는 취급하는 구성도 이해할 수 없다. 게임 플레이의 재미를 위해 전투에서는 그 동안 뽑아둔 캐릭터를 동시에 4명까지 조합해 사용하도록 하고 있으나, 주인공을 제외한 캐릭터들은 메인 스토리를 진행할 때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른바 게임적 허용인 셈인데, 그걸 여기까지 확대한 게임은 해본 일이 없다. 이 위화감은 지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니 게임에 진심
결과적으로 원신은 수준에 미달하는 JRPG일 뿐이다. 서툰 오픈맵에 BoW의 시스템을 어설피 차용해 탐험이 재미없고 스트레스만 쌓인다. 전투는 느리고 지루해 숙달하고 싶지 않다. 스토리 연출이 어색해 몰입할 수가 없고, 1회성 미니 게임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악하다. 프롤로그 극 초반에 나는 이 게임을 더 진행할 의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호요버스가 원신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 초라한 초반부를 슬기롭게 버텨내야 한다.
나는 고통스럽던 지난 날을 넘어 다시 이 게임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될 때까지 2년이 걸렸다. 이 내상은 너무도 깊어 그 동안 이 게임이 이룩한 믿기 힘든 매출과 PS5 리마스터링에 따른 호평 일색의 최적화가 없었더라면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PS5에 최적화되어 있는 원신의 그래픽은 순수하게 놀랍다. PS4에서 봤던 희끄무레한 화면은 PS5에서 어느새 총천연색으로 리마스터링되어 있는데 이런 스타일의 비쥬얼에서 원신의 그래픽 퀄리티는 그야말로 압권이라 할만하다. 게다가 그 로딩의 쾌적함. 타이틀 화면에서 데이터를 읽어들이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로딩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콘솔에서 오픈 월드 게임이 요구하는 로딩에 익숙해진 게이머에게 이런 신속함은 오히려 이질적이다. 이상할 정도로 빨라 익숙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호요버스는 대체 어느새 이 정도의 기술력을 쌓아둔 것일까.
그렇게 나는 원신의 괴이할 정도로 훌륭한 그래픽 퍼포먼스에 기대 그랜드 캐년 같던 프롤로그 챕터를 건너갔다. 이상하게 부족한 스태미너도, 이 스태미너를 늘리기 위해 얻어야 하는 아이템이 이상하게 높은 위치에 있는 것도, 바람의 신 각설이가 묘하게 잘난 척하는 시나리오까지 전부 참아낼 수 있었다. 뒤를 돌아 보니 어느 새 기본으로 지급되는 몬드 삼인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캐릭터들이 모여 있었고, 이들을 이용해 첫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은 처음 이 게임을 접했을 때만큼 불쾌하지 만은 않았다. 미니 게임과 기믹으로 점철된 거대 보스전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재미없었던 걸 제외하면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필드의 완성 - Dragon Spine
그렇게 원신에 이리저리 휘둘리던 나는 암왕제군이 다스린다던 두 번째 도시에 대한 정보를 얻고 퀘스트 마커에 따라 일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오픈월드 게임은 그렇게 해야한다는 편견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저 유명한 드래곤 스파인- 설산에 도착하게 된다.
이름처럼 설산은 물리적으로 추운 지역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연속해서 박히는 동상 대미지를 견디고 간혹 횃불에 몸을 녹이며 나는 설산을 넘었다. 캐릭터 한 두 명 눕는 일은 설산에서 자주 일어난다. 실제로 내가 리월의 따스한 햇살에 몸을 녹일 때까지 세 명이 얼어죽었다. 재탕이 너무 심해서 패턴이고 뭐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보스와 몇 번이고 싸우게 되지만 설산의 혹한 대미지가 무시하기 어려운 긴장감을 준다. 추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이번에는 열원이 전혀 없는 곳에서 혹한 피해를 감수하며 미니 보스를 쓰러뜨려야 하는 구성도 준비되어 있다.
이런 맵을 구성하는 것은 분명 처음일 텐데 능숙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마냥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채롭다. 난이도 밸런스가 좋다. 솔직히 놀랍다는 생각마저 든다. 원신의 시스템 안에서 설산의 모든 것이 특별하다. 열원에 의지해 탐색하고, 벽을 기어오르고, 특별한 돌에서 얻은 속성이 없어지기 전에 특수 얼음을 찾아 깨부수는 설산의 퍼즐에는 원신의 퍼즐이 가진 모든 재미 요소가 담겨있다. 이 필드에서는 초반의 어리숙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간의 편견을 의식적으로 덜어내지 않으면 원신을 명료한 눈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나는 이 게임의 기초가 생각 이상으로 튼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함정이 있다면 탐험의 재미는 설산에서 고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이후 탐험의 재미는 급격하거나 완만한 하향 곡선을 그리지만, 곧 게이머의 심리 속 깨달음의 언덕에서 적당한 수준에 수렴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게임은 탐험을 지속하게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환상의 요소가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물 상자를 열면 돈을 준다! 미친 접근이다. 하나 열 때마다 30원. 레어 상자는 75원. 초 레어 상자는 150원. 이런 식으로 20만원만 모으면 5성 캐릭터를 확정으로 얻을 수 있다. 과금 게임이 아니고서야 시도할 수 없는 기획. 외도에 이단, 끔찍한 불순물. 그럼에도 효과는 확실하다. 없던 모험심도 생겨날 지경이다. 호요버스가 자사 게임만의 특별함과 원신 게이머들의 나태함 속에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았다고 평가할만 하다.
물론 메인 스토리와 탐험을 통해 얻는 재화로 캐릭터를 뽑을 수는 있으나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나는 원신을 8개월 이상 과금 없이 플레이했지만 계획한 바에 따라 뽑은 캐릭터는 네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기서 원신의 또다른 신비한 점이 드러난다. 이 게임에서 캐릭터는 두 등급 밖에 없다. 말하자면 5성과 4성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캐릭터가 뽑혔든 그 캐릭터는 이 게임에서 가장 강하거나 그에 준하는 가치를 가진 캐릭터라는 의미다. 과연 이 정도 쯤 되면, 과금을 하지 않아도 게임 컨텐츠를 즐기는 것에 무리가 없을 만도 하다. 납득할 만한 구성이긴 하다.
이와 같이 완성된 탐험의 즐거움은 이에 대한 모든 기초를 제공한 BoW의 덕이 크다. 그걸 어설프게 참조한 것만으로 원신의 빈곤한 탐색에도 의미가 생긴 바, BoW가 없었다면 원신의 아름다운 필드도 없었다. 물론 흉내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호요버스의 영리함을 읽는다.
스트레스가 세배로 큰 이나즈마에서 유추할 수 있듯 호요버스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BoW 만큼 흥미로운 세계를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는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하루 30분 가볍게 즐겨야 하는 과금 게임에 BoW가 제공하는 완벽한 물리엔진과 창발적인 퍼즐은 필요 없다. 이나즈마의 시행 착오를 통해 느슨하게 구성된 수메르의 맵을 보면 명백하다. 이 게임에 돈을 쓰는 게이머들은 복잡한 구성을 원하지 않고 있고, 원신은 이에 철저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원신은 BoW나 그 외 다른 게임에서 가져와야 할 부분만 선별적으로 가져오고 있다. 못하는 것은 접는다. 곳곳에 현금이 가득한 맵에 이쁘장한 캐릭터를 전시하면 충분하다. 과금 게임의 탐험에 있어 완벽에 가까운 콘셉이다. 영리함을 넘어 영악한 수준이라 하겠다.
시나리오 - 컷씬 발사!
원신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유일한 동료인 페이몬을 통해 진행된다. 페이몬은 견식이 모자라고 순진한 척 행동해서 NPC로부터 설명을 끌어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실을 솜씨좋게 추리하거나 갑자기 발사된 설정들을 조리있게 정리하는 등 스토리 텔링에 있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전략 병기로 활용된다. 원신은 근본적으로 암울한 이야기지만 의식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내기 위한 기법이기도 하다. 밝은 분위기는 어설픈 텍스트를 두리뭉실하게 넘기는 효과도 있어 일석삼조라 할 수 있다.
페이몬 같은 종족은 게임 내에 페이몬이 유일한데도 아무도 이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뭔가 숨겨진 사실이 있을 것 같다. 이 또한 JRPG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본래 그런 기법이기에 향후 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지는 않는다. 전술한 방식을 통한 원신의 스토리 텔링이 기본적으로 설명조에 장황하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설명이 자세한 것에 비하면 이야기의 얼개 자체는 일반적인 JRPG와 구별되지 않고 치밀하지 않다는 점도 마이너스 요소다. 소재가 거창한 것에 비해 서사가 변변치 않은 것이다. 시시콜콜하게 온갖 설정을 설명하는가 하면 주인공의 정체에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대사 몇 줄로 얼버무리기도 하니 균형이 어긋나있다. 페이몬의 입을 빌어 내가 하지도 않았던 일을 복선으로 삼는 묘기는 일찌기 경험해본 일이 없다.
컷씬 착탄!
몬드와 이나즈마에서 많은 피드백을 받고 어느 정도는 개선되었지만 이러한 경향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은 없다. 수메르에서조차 설정을 반만 설명하고 남은 빈 공간에 본인 들만 알고 있는 설정섞인 반전을 자의적으로 끼워넣다보니 표현이 불필요하게 현학적이고 이야기도 정돈되지 않는다. 설정에 집착하면 이야기가 우주로 날아가는 법이니 텍스트 그 자체에 힘을 실었으면 좋겠지만, 호요버스의 오랜 스타일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비루한 스토리 텔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가의 보도가 필요했다. 다행히 호요버스에게는 마르지 않는 예산이 있었으니 해결책은 명료. 원신의 스토리는 마지막에 박아넣는 호화 컷씬으로 클라이막스를 폭발시키는 구조로 완성된다. 달리 말하면 클라이맥스 컷씬을 제외한 모든 스토리 요소가 지리멸렬하다는 뜻도 된다. 컷씬의 퀄리티 자체는 무척 높아 JRPG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테일즈 오브 어라이즈나 제노블레이드 시리즈와도 견줄 만큼 뛰어나다. 그러나 그 동안의 어설프고 늘어지는 대화 연출을 4분 남짓한 초호화 컷씬으로 상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진짜 뭐라는 거야?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서브 퀘스트에서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서브 퀘스트에는 음성 녹음이 필요없으니 텍스트 삽입에 자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메인 퀘스트에 비해서도 특히 대사가 장황하고 강박이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표현이 이어지니 가독성이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다. 쩔어주는 설정을 설명조로 읊는 것이야말로 서브 퀘스트 스토리 텔링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읽는 것 자체가 불쾌할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이 게임은 대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심지어 예산과 시간 문제로 컷씬을 통해 얼버무리는 특유의 구성도 기능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재미가 없을 수 밖에 없다.
호요버스 특유의 기간 한정 퀘스트에도 불만이 많다. 기간이 지나간 퀘스트는 다시는 할 수 없는 것이 골자로,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모르고 넘어가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한정 스토리와, 기간 내 수행하면 제공하는 현금을 볼모로 삼는 비열한 기획이다. 지금 이걸 놓치면 향후 영구적인 게임적/금전적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 잠깐 쉬고 싶은 게이머는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 손실이 아까워 기계적으로 게임을 유지하게 된다. 한술 더 떠 후발 주자는 이와 관련된 콘텐츠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일면식도 없는 캐릭터가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 기세가 무척 당당해 대륙의 기상이 느껴진다. 공짜인데 뭐 어떤가 싶다가도 결국 익숙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힘이 빠지는 것은 그 고생을 하고도 이야기가 안끝났다는 것이다. 원래 있던 놈도 안죽었고 이 놈도 안죽었고 해결된게 없는데 새로운 놈이 등장한다. 과금 게임에서는 과금을 끝없이 이어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이야기가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신은 발매된지 3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이야기는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다. 이야기에 긴장감이 이어지지 않아 중요한 이벤트가 있더라도 금새 식어버린다. 방금 죽은 친구가 물론 중요 NPC이긴 하나 복붙 모델링이라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별로 슬프지 않은데 우리 연약한 주인공이 각본에 따라 애써 분노하는 연출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전투 시스템 - 나선비경 12층
이 게임 스토리가 지루하게 느껴져도 계속 진행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역시 각 캐릭터의 개성적인 성능과 그 조합에 따라 다양하게 기능하는 전투 시스템의 힘이다. 일견 구성이 간단해 보이지만 분석과 공부와 연습이 필요하고 손이 바쁘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다른 컨텐츠와는 달리 향후 포텐셜도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각 캐릭터에게는 약, 강 공격 및 원소 스킬, 원소 폭발 기능이 주어진다. 공중 공격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단차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어 큰 의미가 없다. 또한 이 중에서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능은 대개 원소 스킬과 원소 폭발로, 그 외 공격을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한정되어 있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조작이 재미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원소 스킬에는 쿨타임이 붙어 있어 자주 쓸 수 없고 원소 폭발은 그 원소 스킬을 여러번 사용해 게이지를 채워야 겨우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캐릭터 사용이 제한되는 초반부는 재미가 없고, 성능이 준수한 4명의 캐릭터가 모여야 비로소 게임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이는 나를 비롯한 초심자들이 원신의 초반에서 나가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임의 판도를 바꾸는 조합
요는 4명의 캐릭터가 가진 원소 속성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고, 조합 공식에 따라 증폭되는 대미지를 즐기는 것이 이 게임의 골자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 기술의 쿨타임이나 캐릭터 교체 타이밍을 공부해서 효율적으로 원소를 충전하고 이를 필살기로 연결하는 패턴을 반복하는 사이클을 꾸리면 그것으로 원신의 전투 시스템이 대체로 완성된다. 일부 속성을 제외하면 효율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사실 상 모든 속성이 연계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다양한 속성을 돌려 쓰면 자연히 화면 가득히 이펙트로 가득찬다. 그 덕에 초보자도 쉽게 접근하고 대응할 수 있는 점이 좋다.
그런가 하면 원소 반응은 대미지 딜링 뿐만 아니라 경직, 내성 저하에 관여하고 캐릭터와 무기, 장비가 가진 각종 능력치와 함께 복잡한 계산식으로 얽혀 전투의 효율을 결정한다. 숙련자가 파고들 수 있는 JRPG 특유의 수치적 재미가 복잡하게 녹아 있어 여러모로 고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호요버스는 잘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능숙하다.
신규 캐릭터 한명이 파티의 폭을 넓히는 예시
이 게임은 액션 RPG 답게 공격과 회피가 잘 어우러져 있지만, 실제로 액션 그 자체에 집중한 구성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캐릭터를 바꾸는 것에 쿨타임이 있고, 회복을 넘어 실드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적 공격에 대한 대응보다는 적을 공격하는 것에 힘이 실린다. 납득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는 이 게임을 PS5로 즐기고 있지만, 원신은 원래 모바일 게임이다. 조작을 어렵게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럴 필요는 더더욱 없었으리라.
결과적으로 원신의 오리지널리티는 탐험이 아니라 전투 시스템에 집중되어 있으며,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 새로운 캐릭터를 활용해 적을 농락할 수 있는 원소 반응을 상상하고, 적당한 샌드백을 골라 실험하고, 잘못 이해한 부분을 고치고, 최적의 사이클을 정의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을 높여가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전투 시스템의 핵심에 스피드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맞다. JRPG를 가장 JRPG 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전투 시스템이다. 이것만으로 원신의 제작진은 해야할 일을 대체로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개인적인 원신 최고의 순간
이와 같이 잘 만들어진 전투가 시나리오의 밸런스와 맞아 떨어지면 액션 RPG 특유의 손맛 좋은 보스전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이나즈마 메인 퀘스트의 보스전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단순히 피하고 공격하는 구성이 아니라 드래곤 스파인과 닮은 혹한 패널티에 추가로 대응해야 하는 구성. 보스의 공격력도 방어력도 높아 파티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부터 아슬아슬하다. 빙속성이었던 보스가 화속성으로 바뀌는 반전도 신선하다. 즉석에서 대응 방법을 찾아야 하는 기믹도 변신하는 기믹도 열심히 싸워야 가까스로 이길 수 있는 밸런스도 기꺼웠다. 그 이후 이 보스전 만큼 재미있게 즐긴 단독 전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원신의 전투를 기복없이 높은 텐션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이 게임의 전투가 보스전에 집중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수의 잡몹을 원소 스킬/폭발 콤보로 때려 잡는 난장판스러운 전투가 오히려 원신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 개개의 패턴은 단순해도 다수의 적이 모이면 변수가 늘어나 액션 게임스러운 대응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저 재탕되고 있는 잡몹을 상대로 이미 열시간 이상 익숙해진 파티를 사용해 원소 스킬과 원소 폭발을 번갈아 사용할 뿐이지만, 패드를 부술 듯 연타해야 겨우 구색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손이 바쁘다. 거기서 각자의 플레이 스타일에 유의미한 차이가 생겨난다. 몹의 초반 배치와 특성을 고려해 캐릭터 선정부터 사이클까지 효율좋게 정리하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플레이가 불가능한 나선비경을 통해 원신의 전투 시스템은 솜씨좋게 마무리된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훌륭하다. 잘만든 JRPG 전투 시스템의 표본이라 해도 좋다.
과금 게임의 함정
하지만 원신은 과금 게임이다. 이제는 말 할 수 있기에, 실은 이 게임을 하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틀에 박힌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과금 게임은 비틀려있다. 과금 구조를 통해 호요버스는 플레이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원신의 즐거움을 거세하고 규제한다. 대표적인 예로 원신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자신이 원할 때 가질 수 없으며, 이는 플레이어가 원신의 전투 시스템을 온전히 즐길 수 없도록 방해한다.무과금 유저에게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뽑고 싶은 캐릭터를 뽑을 수 없는 것은 물론 뽑을 수 있는 캐릭터 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을 남보다 더 재미있게 하는 것이 지상 과제인 게이머들이 돈을 쓰는 상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돈을 쓰면 더 다양한 캐릭터를 쓸 수 있고, 다양한 캐릭터를 사용할 수록 게임이 재미있어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일부를 제외한 5성 캐릭터들은 한정된 기간 동안에만 뽑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 언제 뽑을 수 있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과금에 대한 욕구를 더욱 부추긴다. 이른바 과금 유도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많은 플레이어들이 원신의 자연스러운 과금 유도를 원신의 강점으로 꼽는다. 돈을 쓸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자명하다. 플레이어는 게임에 돈을 쓰면 쓸 수록 게임의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돈을 써서 구매하고 더 많은 돈을 들여 강화한 캐릭터는 투자하지 않은 캐릭터보다 비할 바 없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을 쓸 수록 강한 캐릭터가 늘어 게임 플레이가 쉽고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하드 모드도 아닌 이지 모드를 돈을 주고 구매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십만원을 지불해 구입한 캐릭터가 약하다면 이 또한 말이 안되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을 넘어 즐기는 것이 과금 게임이다.
가지지 못한 자의 나선비경
아무리 도전해도 이길 수 없었던 적에게 가볍게 승리하는 순간, 게이머는 쾌감을 느낀다. 문제가 있다면 그 쾌감을 돈으로 샀다는 점 정도일까. 실은 이것이야말로 플레이어들이 과금을 하는 이유인 것인지도 모른다. 게임을 클리어하는 쾌감을 돈을 지불해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과금 체계는 정말로 양심적인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시스템 분석을 통한 공방과 패턴 검토, 시행 착오를 즐기기 위해서는 돈을 쓰면 안된다. 하지만 돈을 쓰지 않으면 캐릭터를 폭넓게 키울 수 없다. 때문에 파티 조합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 원신의 아이러니가 되겠다. 게임 플레이에 돈이 얽혀 있기 때문에 게임을 가장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제작사 레벨의 고민이 부족하다. 게임 밸런싱의 많은 부분을 플레이어의 자의적 통제에 의존하고 있으니 제작사의 의도와 방향성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호요버스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순수하게 즐기는 대신 자제심을 잃고 과금을 하는 일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과금 유저들은 게임 플레이보다 뽑기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얄팍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술이지만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행성이 짙은 뽑기 그 자체가 중독성있는 콘텐츠인 까닭에, 과금 게임에는 고정 금액으로 캐릭터를 제공하는 옵션이 없다. 그럴 만한 일이다. 기대값보다 5만원 저렴한 15만원을 지불하고 5성 캐릭터 한명을 확정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된다면? 그처럼 재미없는 기획이 달리 없을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의 보스 사냥
원신이 과금 게임이기에 발생하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원신에는 레진으로 대표되는 과금 게임 특유의 피로도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다. 캐릭터를 성장시킬 아이템을 얻는데 반복 플레이가 강요되는데, 그런 반복 플레이를 하루에 4번 밖에 할 수 없다. 내가 키우고 싶을 때 키우고 싶은 만큼 키울 수 없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불쾌한 일이다.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성장 아이템의 수량이 한정되어 버리니 계획에 따라 소모하지 않으면 시간이 아니라 날짜 단위로 게임의 진행이 더뎌진다. 괜한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만큼 자유로운 캐릭터 조합을 통한 실험적 플레이가 제한된다. 효율적인 구성이 각광받고, 그러지 않으면 게임이 지루해진다. 선택과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 플레이를 강요하는 구성은 원신의 그나마 내세울 만한 전투 콘텐츠 조차 갉아먹는 가진 만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레진을 통해 강제되는 반복 플레이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캐릭터 1명의 성장을 위해 특정 보스와 최소한 20번은 강제로 싸워야 한다. 패턴을 공략하는 재미가 있는 것은 처음 두 세번 뿐이다. 이후엔 디지털 샌드백 타임이다. 하루에 4번만 싸울 수 있으니 첫날만 재미있고 다음날 부터는 재미가 없어지는 셈이다. 패턴을 파악할 때 느껴졌던 두근거림은 금새 사라진다. 보스의 모든 패턴이 텔레폰 펀치고 의외성이 없다시피 한 탓이다. 그러므로 보스가 리젠되는 시간이나 보스를 찾아가는 시간도 아까워지는 것이 보통이니 이런 형태의 반복 플레이가 재미있을 수 없다. 전략을 다듬어 클리어 타임을 줄여나가는 재미만 남는데, 이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게임 체인저의 효능
라이덴 파티가 각청 파티보다 플레이 자체는 단순한데도 더 인기가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원신이 어렵지 않은 적들을 반복적으로 사냥해야 하는 게임이라 갈수록 복잡한 플레이를 하기 귀찮아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신에 많은 과금을 하는 게이머들은 어려운 적을 얼마나 쉽고 생각없이 잡을 수 있는지 경쟁하고 있는 판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뽑아 얼마나 게임을 날로 먹고 있는지 자랑하는 것이다. 게임 플레이는 점점 사라지고 과금만 남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호요버스의 노림수. 어디로 가도 원신이 돈을 쓸어담고 있는 결과로 이어진다.
돈을 쓰지 않으면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게 되지만 돈을 쓰면 밸런스가 무너져 내리는 구조. 이에 더해 물리적으로 게임에 얽매여 유쾌하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이를 위해 게임 플레이가 훼손되는 현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한정적인 게임 콘텐츠로 될 수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을 소모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과금 게임 특유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료로 게임을 즐기는 와중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가도, 결과적으로 호요버스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나도 많이 참았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 이세계 아르바이트를 한 것 같은 감각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굳이 과금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원신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맵을 현금 상자에 취해 탐험하는 원초적인 재미가 있고, 그 과정에서 잘 정돈된 전투 이벤트를 과금없이 클리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굳이 돈을 쓰지 않아도 되는 만큼 반복이라는 이름의 설산을 넘어 가늘고 길게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다른 과금 게임은 이렇진 않을 것 같다. 정확히는 내가 많은 시간을 사용한 원신이 다른 과금 게임과는 긍정적으로 차별되는 부분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스스로의 얄팍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다만 더이상 과금 게임의 비틀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과금 게임의 미래
핵심 기획과 모션을 표절로 시작했기에 아낄 수 있었던 예산과 시간을 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세우기 위해 사용했다는 비판은 앞으로도 원신을 끝까지 따라다닐 텐데, 어차피 호요버스는 뭘 참고하거나 베끼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호요버스는 계속해서 다른 게임의 좋은 점을 차용할 것이고, 스스로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 부분에 집중해 원신을 비난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괜한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신은 과금 게임이면서도 어지간한 JRPG보다 게임 플레이가 충실하다는 점이다. 이미 유수의 중견 콘솔 JRPG조차 전투 시스템 그 자체는 원신에 추월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원신을 기피하는 유저들이 많고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업계 관계자라면 원신의 구성과 실적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거드름피우며 백안시하기에 호요버스가 이룩한 것이 크고, 아직은 콘솔과 과금 게임 유저가 나뉘어 있으나 경계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원신으로 대표되는 과금 게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각 제작사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아니면, 반대로 답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호요버스는 그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6주에 한번씩 업데이트를 수행하는 제작사이기 때문이다. 원신 유저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신의 게임 시스템은 예상보다 좋은 수준에 그쳐 있을 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과금 게임은 그 구조에 의해 게임 시스템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한계가 있으므로 더욱 그렇다. 내가 게임에 과금을 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텐데, 이는 내가 원신의 즐거움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 또한 없을 거라는 의미와 같다. 게임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에 과금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에 게임 그 자체로 대성하는 일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임 구조상 이 한계는 걷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개인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데드 엔드에 가깝다.
스스로도 지나친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가 맞다. 게임 회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나라 게이머들은 직간접적으로 재미있는 게임을 만든다는 본연의 이상이 훼손되고 난 뒤 게임이 어디로 가는지 지척에서 관찰하고 있다. 언젠가 서비스 종료와 함께 사라질 데이터를 대여하는 일에 요구하는 과금이 너무 지나치다는 의견은 앞으로도 무시당하는 걸까. 향후 과금 게임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세련된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업계의 대세로 자리잡는 것일까. 아니다. 거부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