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신 (1)

*원신의 소+여행자. 그리고 다른 여러 캐릭터들. 소루미가 조금 들어간 채 '소'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야차는 피에 젖어 태어났다.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도, 안개에 가려졌던 눈을 걷어준 위대한 이의 손안에서도.

그러니 야차의 길은 피에서 시작되어 피에서 끝날 운명이었다. -<호법 야차>

-갇혀 있는 건 싫어.

소년은 망서 객잔의 꼭대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리월의 높은 산맥을 전부 뒤덮은 안갯속 그의 얼굴은 점점 선명해져 가고, 황금빛 두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차갑고 서늘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털어내고, 소년은 희미한 입김을 내뱉었다. 귓가에 닿는 머리카락과 등 뒤에 닿는 밝은 초록의 머리칼들이 조화롭게 섞였고, 수려한 얼굴은 시간을 흘려버린 듯 고요했다. 달의 운행이 다섯 뼘이나 지나갈 동안 팔을 걸친 창의 피 냄새도 씻겨나갔다. 붉은 기와로 된 지붕에서 균형을 잡은 소년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드높은 바위들이 솟은 이곳은 바위의 땅 리월이었다. 항구 도시로 바위와 상업과 계약의 신 암왕제군을 모시고 있는 리월에는 선력을 가진 선인과, 마신의 원한이 깃든 마물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공존했다. 세상의 일곱 집정관이 존재하기도, 마신 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고통받던 속세는 암왕제군과 다른 여러 선인들의 무력으로 평화를 찾았다. 그러나 찾아온 평화에도 많은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선인들은 속세의 뒤로 물러나 침묵했고, 거대한 상인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리월 칠성이 전반적인 정치를 좌우했다. 마신 전쟁과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은 그들의 원한을 짊어질 때면 자주 잊곤 하는 평화가 지금의 대기에 감돌고 있었다. 리월을 수호하는 삼안오현 선인, 제군의 명을 받든 호법야차 대장 '소'는 가볍게 망서 객잔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이 머리와 몸을 스치고, 천 년 전의 전투복 안으로 밀려들었다. 길고 독특한 소매와 옷의 여러 구멍 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지친 살갗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지금은 마신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인이 태어나고, 평화가 도래한 시대였지만 소에게 시대란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마물을 부수고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수천 년 동안 몸에 익은 전투는 강력한 신력을 가진 이에게는 찰나에 불과했다. 마물을 없앨 때마다 깃들어 자신의 뼈를 부식시키는 업장도 다른 이가 아니라 이미 피투성이가 된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 기꺼웠으니.

소는 쉽사리 바닥으로 내려서 물가로 걸어갔다. 무너져서 누구도 보수하지 않는 다리를 지나면 리월 항이나 대지의 소금으로 향할 수 있었다. 달리 마물을 처리해야 할 곳이 있나. 소는 지친 감각을 다시금 끌어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여린 이들의 축제이자 원한이 들끓어 폭주하는 해등절 축제가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마물은 사전에 처단한 상태였다. 이번 해등절 역시 무사히 넘겼지만 해치워야 할 마물이 없는 그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는 누구도 보수하지 않는 다리에 앉아 다리를 휘감는 물살을 보고 있었다. 해등절 때 날린 등불은 진한 기름을 써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기름기에 혹한 물고기들이 나무판에 걸린 등불을 뜯어먹다가 소년의 다리를 보고 놀라 도망쳤다. 소는 물고기가 헤엄치며 남긴 파문을 건드리며 반짝거리는 비늘을 상상했다. 인간들이 빛나는 쓰레기-등불-를 날려보내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 연초에 열리는 해등절 축제의 주요 일정이었다. 해등절에는 방문을 거르지 않는 활발한 음유시인이 알려주기를 그 등불은 사람들이 소원을 적어 날려보낸 것이라 했다. 문득 얼마나 중요한 소원일지 궁금해진 소는 여전히 떠 있는 등불을 들어 올렸다.

'오빠를 찾을 수 있게 해주세요.'

다정하군. 그 밑에 적힌 자세한 내용은 물에 풀어져 지워져 있었지만 떨어져 있는 혈육을 찾는 것 같았다. 청록 빛이 도는 종이는 몬드의 국경 마을에서 해등절 때 같이 날려보내는 등불이었다. 몬드에서부터 리월까지 날아왔다면 이 등불은 진정 행운을 가진 것일지도 몰랐다. 소는 물에 번진 글씨를 만지작거리다가 젖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자신의 몸에서 가장 순수한 힘이 있는 곳은 가장 깊은 심부였다. 손끝을 휘젖자 거친 회오리가 만들어져 물기를 날려보냈다. 소는 기름 먹은 종이를 부드럽게 접어 한 입에 넣을 크기로 만들었다. 그는 마른 혀 위에 종이를 올리고 씹어 삼켰다. 최대한 이빨이 닿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목로 넘어가는 기름기는 설핏 「패배자의 꿈」처럼 느껴졌다. 소는 반사적으로 떨리는 몸을 억눌렀다. 억지로 입을 벌리고 삼키게 하는 다른 이들의 살과, 눈물로 이뤄진 풍족함은 그가 마신의 아래에서 휘둘릴 때 매일 삼켜야 했던 것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망가져야 했던 평범한 이들의 삶과 고통이 느껴져서 삼키지 못해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될 것이 뻔했으니까. 자신의 약함을 저주하던 시절이 떠오르자 소는 등불을 거의 토해낼 뻔했다. 약해져 있던 업장이 거세어져 유약해진 정신을 침범하고, 소는 정신을 내주지 않으려 눈을 떴다. 자신은 마신 전쟁에서 구원받았고 지금의 상황은 속세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결단이었다. 소는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겨눴다. 만약 자신이 고통에 굴복해 강력한 마물이 된다면 단숨에 끝내야 했다. 선인과 일체가 된 소원은 대부분 이뤄지니, 등불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소는 감은 눈꺼풀 속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무시하고 눈을 떴다.

별이 수놓아진 드넓은 하늘을 마주했을 때, 몸속의 바람과 뒤섞인 소원은 「아름다운 꿈」으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