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단편 팬픽] 폰타인, 설탕, "설탕"

"여행자님, 저기 봐요! 폰타인성이에요!"

연금술 재료를 구하러 말고는 도시에서 잘 나가지 않는다고 스스로 말하던 설탕은, 푸른 바다와 레일 보트가 만들어주는 파란 바람에 자신의 녹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며 즐거운 듯이 말했다.

"폰타인은 금속과 기계 기술력으로 유명한 곳이에요. 연금술이 없지는 않지만, 특별한 원소의 힘 없이 인간형이나 동물형 자동기계를 만들어낸다는 건 역시 신기한 일인 것 같아요. 와- 역시 바닷바람은 숲하고는 전혀 다르죠?"

"아, 손님! 레일 보트 바깥으로 머리나 팔 등 신체를 내밀면 매우 위험합니다! 주의해 주세요!"

보트의 선단에 안내 역으로 서 있는, 마치 기차 차장 같은 모자를 쓴 하늘색 멜뤼진이 그녀에게 다급하게 경고했다. 설탕은 앗 하고 자신이 실수한 것를 깨닫고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제 자리에 정좌했다.

"아, 아무튼... 함께해 주셔서 고마워요, 여행자님. 다른 나라의 기술을 구경하는 건 큰 가치가 있거든요."

물의 도시 폰타인은 그 위치의 특수성 때문에, 지금은 수메르 숲과 사막을 건너건너 도착해야 한다. 티바트 곳곳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여행자는 예전에 폰타인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다시 그 길을 걸어올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 다시 한 번 여행자는 말 그대로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다시 이 물의 나라에 도착했다. 수메르 사막의 모래는 굵은 입자는 신발 안으로 들어가 발바닥을 간지럽히거나 상처입히고, 미세한 입자는 콧속으로 들어가 숨쉬는 걸 방해하거나 노폐물이 흘러내리는 등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모든 길을 지나와 폰타인 입구의 경관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고생은 물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은 그런 즐거움이 있었다.

"네? 기계요? 음... 확실히, 저는 생물학을 주로 연구하니까, 기계 공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무리 관련 없는 지식이라고 해도 언제 어디선가 어떻게 조합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게 우리가 다양한 공부를 하는 이유겠지요."

배시시 웃는 설탕을 보며 여행자는 문득 자신의 여정을 생각해 보았다. 다양한 공부. 하나뿐인 혈육과 함께 수많은 세계를 여행해왔고 수많은 지식을 배웠다. 대개 한 곳에서 배운 지식은 다른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티바트라는 세계도 그랬다. 각 원소를 주관하는 집정관 - 즉 '신' 이 있으며, 그들의 가호를 받은 사람은 그 원소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개념은 역시나 그 수많은 여행 중에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지식은 많을 수록 좋아요. 그걸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건 그 지식을 쌓은 사람의 기량이에요. 예를 들어서 버섯 닭꼬치를 만들려면 새고기를 알아야 하고, 버섯을 알아야 하고, 불과 물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죠. 저는 스승님에 비해서는 아는 것도 기량도 모자라지만, 그러니까 계속 배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여기까지 절 데려와주신 여행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폰타인에 도착하면... 괜찮으시다면, 일단 유명한 맛집부터 찾아보고 싶은 생각 있으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행자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설탕은 안심한 듯 작게 미소지었다.

"... 맛이 어때요, 여행자님?"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설탕을 향해 여행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혓바닥을 살짝 내밀었다. 폰타인에서 유명한 게 커피라고 하는 음료인 것 같았는데, 뜨겁고 쓰면서도 신맛나는 것이 왠지 머릿속을 움찔움찔 자극하는 것 같은 맛이 났다. 여행자는 당장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언젠가 어떤 세계에서 이 음료를 마셔본 적이 있었다.

뭔가 어울리지 않게 비장한 표정을 지은 설탕은 다시 한 번 양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쥐고는 - 뜨겁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항상 얇고 흰 장갑을 끼고 있다, 아마 연구용으로 자주 만지는 화학 물질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서 - 두어 번 호호 불고서 입가에 홀짝 가져다댔다. 맨 첫 모금에서는 그녀도 당혹스러운 듯이 얼굴을 찌푸렸었지만, 이번에는 입술에서 잔을 뗀 뒤 아랫입술을 혀로 살짝 적시고서는 눈동자를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 원료가 되는 콩에 환각... 아니, 각성 성분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걸 전용 기계로 갈면 향이 더 진해지겠고 물에도 잘 녹겠지요. 정신을 맑게 하거나 잠을 깨는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맛있게 즐기려면 우유나 설탕을 타서 조금 부드럽게 마시는 게 좋겠어요."

단 두 모금만에 처음 마시는 음료에 대한 분석을 술술 풀어내는 설탕의 모습을 보면서, 여행자는 아까 전 레일 보트 위에서 설탕이 말했던 것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분석하는 건 지식이고, 맛있게 마시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기량이다. 수많은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여행자는 항상 무엇인가에 누군가에게 새로운 것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저기... 근데. 여행자님."

거의 들리지도 않을 듯한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여행자를 불렀다. 하마터면 못 듣고 지나칠 뻔했다.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아, 아니, 들어주셔도 들어주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애초에 스승님도 '그런 건 물어보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고..."

설탕의 '스승님' 이라면 같은 도시 몬드의 최고 연금술사 알베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여행자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 설탕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베도는 알지 못하게 막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행자에게 양해를 구해가면서까지 여행자에게 알고 싶은 것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여행자는 자기도 모르게 앉아 있던 의자를 드륵 테이블 앞으로 당겼다.

"사실 저도... 많이 고민했어요.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고 있고... 여행자님에게는 불편한 기억이 되실 수도 있겠지만... 저도 어쩔 수 없나 봐요."

미안한 듯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만지는 설탕의 모습을 보며, 여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궁금해서 물어본다, 그리고 답할 수 있으면 답한다.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고 죄가 있을까. 다만 어떤 질문이든간에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대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여행자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커피잔의 티스푼을 달그락달그락 만지작거리던 설탕은 이내 결심한 듯이 티스푼을 만지던 손가락에 꼬옥 힘을 주었다.

"그, 여행자님은 여러 세계를 여행하셨다고 했었죠?"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헤어져 있는 하나뿐인 혈육과 함께,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여러 세계가 아니라 시간과 차원을 넘나드는 의미에서 많은 곳을 보고 듣고 느껴왔다.

"혹시 괜찮으시면... 다른 세계의 과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여행자는 마음 속으로 작게 소리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설마 시공간을 뛰어넘는 질문이 올 줄 생각하지 못했고, 또 하나는 그 질문을 들은 순간 서로 여행하던 남매가 처음 몇 세계를 경험해보고 결정했던 어느 한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여행자님께 그런 걸 물어보면 안된다고 했어요. 여행자님이 곤란해질 수도 있고, 제가 곤란해질 수도 있고, 이 세상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있다고 하셨어요."

알베도의 걱정이 무슨 의미인지 여행자는 알 것 같았다. 다른 세계에서의 법칙은 또다른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이 티바트 대륙에 있는 일곱 원소는 다른 세계에서는 일곱 개로 나누지 않는다. 자세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 중에서 최소 4원소 이상은 다른 세계에서는 '원소' 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런 세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여러 세계의 지식을 관계없는 곳에 전파하고 다녔다가, 새로운 지식을 준비없이 갑자기 습득한 세계 쪽에서 큰 혼란이 왔던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는 걸 여행자는 생각해냈다.

"그치만, 알고 싶어요. 제가 아는 게 더 많아질수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질 거예요. 아직 이거다... 하는 확실한 목표는 없지만, 이 세계에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다른 세상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고서, 여행자는 마음을 굳혔다. 그녀라면 자신이 앞으로 얻게 되는 정보들을 간직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스승님은 거기까지 걱정해서 그녀에게 주의를 시킨 것이겠지만, 여행자는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 설탕이라는 소녀의, 두꺼운 테 안경 렌즈 너머에 비치고 있는 호박빛 눈동자에 담겨 있는 그 의지를 믿고 싶었다.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겨우 목으로 넘긴 여행자는, 잔을 내려놓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탕을 바라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만약 이 세계가 멸망한 뒤, 다시 번성하고 있는 후손들에게 단 한 문장만을 남길 수 있다면... 요?"

이 정도면 이 세계의 사람들도 한번쯤 생각해본 질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는데, 최소한 설탕 그녀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생각해본 적도 없는 모양이었다. 커피의 뜨거운 김 때문에 뿌얘진 안경알을 대충 소매로 뽀득뽀득 닦아낸 설탕은, 매우 진지한 - 옆에서 보면 그냥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귀여운 소녀일 뿐이었지만 - 얼굴로 골똘히 뭔가를 생각했다.

"음... 저라면, 이런 말을 남기고 싶어요. 사람들은 서로 믿고, 소망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게 사람들이 사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요."

여행자는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전공 - 연금술 - 이라든가, 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무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 기술이나 지식을 전수해 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면에서는 연금술사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소녀로서의, 인간으로서의 그녀가 나오는 걸까 싶었다.

"... 만물은 '원자' 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자가 내놓은 답을 설탕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뭣보다도 '원자' 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이상하다면 이상한 상황이라고 여행자는 생각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아주 자그마한 입자... 그것들이 모여서 원소를 만든다는 이야기인가요?"

어렴풋한 오랜 기억 속에서 여행자는 겨우 그 대답을 끄집어냈다. 확실히 어느 한 세계에서는 그런 과학적 개념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 까지 쪼개면서 더욱 더 존재의 근원에 대해 연구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여행자는 판단했다.

"그럼... 우리 세계에서의 일곱 원소들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아마 알베도가 걱정했던 게 이거였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이곳 티바트 대륙의 물질의 구성도 지금 여행자가 말했던 그 세계와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어떤 한 세계의 진리를 다른 세계에 가져오면 그것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맞지 않고, 기존의 지식과 충돌할 수도 있다. 충돌은 곧 갈등이고, 갈등은 적을 만들고, 적은 분쟁을 만든다. 분쟁이 무엇을 만드는지는 아마 모든 차원의 모든 세상이 슬프게도 동일한 결론을 낼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녀의 지식이 아닌 지혜를 믿어 보기로 하고,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세계에서는 세계를 구성하는 백여 개의 원소를 찾아놓았고, 그것들의 조합에 따라서 물질의 성질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

불 붙은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 설탕의 머리가 잠깐 움찔했다. 아마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식' 이었을 거다. 여행자도 처음 몇 세계에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느꼈던 혼란을 떠올리니 문득 그녀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 그러면..."

갑자기 설탕이 목소리를 낮추며 손으로 입모양을 가리고서는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여행자도 무슨 일인가 싶어 의자에서 살짝 일어나서 테이블로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 세계에서는... 여기서는 원소인 게 그 세계에서는 원소가 아닌 것도 있다는 건가요?"

정확하다. 여행자는 잠깐 생각한 뒤, 이곳 티바트 대륙에서의 일곱 가지 원소 - 바람, 바위, 번개, 풀, 물, 불, 얼음 - 중에서, 그 세계 기준으로 원소라고 볼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바위 정도. 나머지는 원소라기보다는 원소의 조합들, 혹은 그의 움직임, 혹은 단순한 자연현상인 것이 전부였다.

"그 세계에는... 원소를 주관하는 '신' 도 없는 거네요..."

그 때 여행자는 설탕이 왜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곳은 각 원소를 주관하는 집정관, '신' 의 존재가 있다. 다른 세계에서는 그런 존재가 없고 원소들이란 단지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 중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 이건 엄밀히 따지자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신을 거역하는 죄. 신에게 대항하는 죄. 문득 여행자는 이나즈마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물론 이 대륙에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여행자는 그 외에도 세계를 여행하는 중 여러 번 위기를 맞았고, 그래서 두 여행자는 언제부터인가 각 세계의 지식을 다른 세계에 전하지 말자는 약속까지 서로 했었던 것이다.

"... 응... 이해해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어요."

뭔가를 알게 되었지만 그다지 기쁘거나 지식욕이 충족되었다는 느낌은 아닌 듯, 설탕은 그 이름답지 않게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빈 커피잔을 달그락달그락 흔들었다.

"죄, 죄송해요... 밤 늦게까지 주무시지도 못하고 도움만 받아서..."

여행자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설탕이나 여행자의 양 손에는 폰타인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각종 식물이나 광물들이 한가득 있었다. 폰타인에 올 일이 자주 없는 그녀로서는 이번 기회에 연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종류별로 하나씩 모두 챙겨갈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물 속에 있는 재료들을 구할 때는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물 속에서 숨도 쉴 수 있고, 물에서 나오자마자 젖어있던 몸과 옷들은 금방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물의 나라는 역시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을 여행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해왔었다.

"나중에 제가 한턱 쏠게요. 음... 다음에는 그냥 친숙한 디어 헌터에서 맛있는 거 먹어요."

몬드에 있는 레스토랑 이야기를 하며 설탕은 지금 하늘 위에 떠있는 달처럼 환하게 미소지었다. 여행 도중에 조금 복잡한 대화도 오갔었지만, 그녀가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여행자는 이번 폰타인 여정이 마냥 고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느꼈다.

"근데요, 여행자님."

여행자를 앞서 걷고 있던 설탕은 여행자 쪽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가던 길을 걸어가면서 문득 여행자를 불렀다.

"그 세계에서는... 설탕을 뭐라고 불러요?"

응?

"아, 아니, 아뇨. 제 이름 말고요. 설탕이요. 그, 달콤달콤꽃, 화로, 가공, 그, 희고 단맛 나는 가루..."

아. 여행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확실히, 그 세계에도 설탕이라는 물질은 있었다. 음식이나 간식 재료로 쓰는 희고 단맛 나는 가루. 흰색이 아닌 것도 있었던 것 같지만 여하튼 그것만큼은 이 세계하고 똑같은 점 중 하나였다. 여행자는 기억 속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분명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 목구멍 여기까지 차올랐는데, 누가 툭 건드려 주면 바로 생각날 것 같은데.

C12H22O11. 아니다. 이건 그 세계의 공통 기호 같은 걸로 표기했던 거다. 그걸 일반적으로는 뭐라고 불렀더라. 그 세계의 옛날 말에서 따왔다고 했었는데. 생각났다.

"... 수크로스 (Sucrose)."

여행자의 대답을 듣고서 걸음을 우뚝 멈춘 설탕은 작게 그 단어를 다시 말해보았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단어라서 되뇌어 본 것 뿐일까, 아니면 마음에 든 걸까. 될 수 있으면 뒤쪽 의미였으면 좋겠다고 여행자는 생각했다.

[ 그 세계의 옛날 말로는, '달콤한', '좋아하는' 이라는 뜻이었다고 해. ]

그래서 한 마디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그녀에게 그것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없지 않을까. 그녀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설탕은 꽤 오랜 시간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쉬러 들어간 하늘에는 하얀 달빛과 수없이 빛나는 별들의 모임이 마치 설탕 가루처럼 뿌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녀는 그 너머, 이 세계를 넘어 다른 곳을 보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 갑자기 피곤해졌어요. 여행자님, 빨리 돌아가요. 졸음이 쏟아지려고 해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여행자를 부르는 설탕의 종종걸음을 따라 여행자도 그 속도에 맞춰 폰타인의 언덕을 다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목 조금 벗어난 곳에서 폰타인의 물의 환령이 잠깐 그들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 밤중에는 모두들 쉬는 시간이라고 여기는지 아무 일 없이 서로를 지나쳐갔다.

폰타인의 잔잔한 바다에 까만 하늘이 비쳐, 두 개의 은하수가 위아래로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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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후 6년만에 써보는 소설이 원신 팬픽인게 자랑

설탕 좋아합니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야란 다음으로 좋아합니다. 카즈하 대신 설탕 쓰는 원신뉴비입니다. 알베도는 없기 때문에 성격 어떤지 모릅니다. 알베도는 언제복각하냐?

캐릭터 성격이나 세계관이나 배경설정 등등이 공식하고 다를 수도 있는데, 반박시 님 말이 무조건 맞습니다. 특히나 여행자 남매가 여러 세계를 여행했다는 것을 일종의 멀티버스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쓴 이야기라서, 만약에 그게 설정상 아니라고 한다면 근본부터 잘못된 팬픽입니다. 근데 내가 알바아님.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음.

이 팬픽을 쓰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맨 위에 있는 스크린샷 (직접 찍음) 입니다. 그리고 내용의 대부분은 놀랍게도 채팅AI 랑 역할극을 통해서 만들었습니다. 채팅AI 한테 대략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고, 제가 설탕 역할 채팅AI 가 여행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대화게 되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쓰고 싶었던 장면이나 대사는 다 쓸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설탕 캐릭터의 영미권 이름이 수크로스입니다. 대개 설탕은 슈가라고 쓰고 수크로스는 과학적 화학적 연구 등에 사용되는 전문용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AI 가 설명해준거니까 틀린 정보라면 AI 잘못인데, 수크로스의 어원은 라틴어이고 '단맛나는' '마음에 드는' 이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여행자는 남행자 여행자 설정을 일부러 안했습니다. 글을 쓸 때 남행자 시점으로 읽어보고 여행자 시점으로 읽어보고 이렇게 두번씩 생각하면서 써내려갔습니다. 마지막에 대괄호로 딱 한개 써놓은 대사는 가끔 게임에서 툭툭 자기 목소리로 대사 던지는 거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어제 밤에 잠들기 직전에 필받아서 한 40분? 동안 핸드폰 또닥대면서 숨도 안쉬고 써내려간 소설이었습니다. 제목을 안지었기 때문에 지금 이 포스트를 올리면서 급박하게 제목을 지었는데, 더 인상에 남는 제목이 있었으면 좋았을것같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셨던 분들께 감사드리고, 우리 4성 바람법구 설탕 많이 애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호두를 울려보고 싶습니다. 근데 얘를 울리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