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아카이브와 소년성
2004년 허문영이 씨네21에 작성한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은 오늘날 한 편의 정전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2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로 읽힌다. 이 글을 인용하는 필자들의 의견은 대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고뇌하지 않는” 인물상을 지적하면서, 이들을 ‘고아’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가족에 입문하는 경향을 지적하곤 했다. 짧게 요약해서 “아버지의 부재, 여성의 탈락, 형제애의 찬탈”로 서술할 수 있는 이 소년성은 한국 영화를 서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으며 이를 따라 어른의 도식도 출몰했다. 여기서 어른의 도식이란, 몸은 다 컸지만 속은 아직 유년기에 머무른다는 것으로써 “선진국이지만 아직 시민의식은 미성숙한” 것을 지적하는 일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소위 말하는 2010년대 중반의 ‘헬조선’ 담론을 뜻하는데, 이 시기의 영화들에서 ‘소년성’이란 특정 인물이라기보단 영화 자체에 적용되는 한 가지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은 베르그손의 말처럼 물질과 기억 사이에 시간 차가 자리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헬조선을 뉴스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영화 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모호했다. 정작 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더는 ‘뜨거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담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월호 이후 변해버린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곧바로 영화 매체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걸 잘 안다. 평자들은 그에 대해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서술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마치 허문영의 소년성처럼 한국사회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
세월호 시기 한국 사회에 출몰해 온 문구는 “어른들이 미안해”였다. 어른이 아이를 보듬는 게 사회의 의무라고 말하는 이 문장이 함의하는 바는 명확하지만, 정작 ‘어른’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것에 의문을 품어보아야 한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결혼할 나이를 어른이라 한다면 30대 중반, 투표권을 기준으로 하면 만 19세가 정도가 된다. 사회적 조사에 따르면 30대 초반까지는 여전히 자신을 어른이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꽤 높다고도 하며, 이를 따라가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수는 가히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지적을 따라서 ‘미안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여전히 소년이기를 자청하는 이들에게서 ‘미안해’라는 감정은 회피되거나 혹은 생략된다. 미안해, 라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이들에게서 책임감을 찾기란 어려우며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책임의 범주를 굉장히 넓게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아이와 어른이라는 이분법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는 소년성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한국 사회는 책임의 문제를 고등한 차원의 것으로 넘겨짚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숭고의 기능과도 같아서 한국 사회는 ‘책임’이라는 말을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등장한, 이해되지 않는 무언가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직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에게서는 자신을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존재’ 즉 ‘부모’로서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의 ‘소년성’이 파악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모의 문제는 애석하게도 저출산 사회와도 긴밀히 연관된다.
사회 전반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할 의향은 없다. 하지만 저출산 사회가 의미하는 것은 탄생의 행위 자체가 점점 희귀해짐으로써 우리가 그걸 경외심 담긴 무언가로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마치 <칠드런 오브 맨>의 세상처럼, 참된 의미의 공동체는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유토피아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어른’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부재로 인해 그 의미를 잃고야 만다. 소년/소녀의 반대항으로 어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어른’이라는 말은 그 책임의 대상을 개인에 돌리며, 자기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년성’은 방향상실의 감각만을 갖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이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우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책임감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자신을 돌보기에 더 바쁠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른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며, 사회 전반에 관한 책임이라기보다는 분노와 공포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 즉 ‘책임’이라는 숭고의 행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른’은 경외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점에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은 어른으로서의 사과 표시라기보다 “되지 못한 자”로서의 슬픔을 공유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러니 이런 표현이 사용 가능하다. 소년들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소년들은 공동체에 헌신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바로 그 책임은 마치 숭고와도 같아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년들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소년의 성질을 예비가 아닌 ‘잔존’의 맥락으로 파악했다.
세월호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소년’은 가능한 주체가 아니었다. 소년은 살아남은 자로서 영원히 숭고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고 이를 따라 ‘~된다’라는 수식언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이는 들뢰즈식의 가능언이 아니라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처럼 늘 미완에만 그친다는 점을 뜻한다. 이른바, 한국 사회에서 소년성은 책임이라는 말을 수행 불가능한 과업으로 여기면서 그 앞에서 멈춰버린 이들의 자조적인 형태에 가까웠다. 요컨대 ‘어른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은 자신을 어른에 소속시키는 게 아니라, 어떤 어른이 있고 그게 되지 못하는 사실 자체를 일컫는다. 이는 몸이 아직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참극들, 명석한 두뇌에 비해 행동력이 따르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을 가리키며 소위 말하는 ‘총을 다루지 못하는 이미지’로써 풀이된다. 발기부전에 빗대어지곤 했던 이 발포불능은 사정을 하지 못하는 신체, “사춘기 이전의 소년”을 직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소년성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소년성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자신에 대한 무기력함으로 이어진다. “어른이 되면, ~을 해야지”라는 희망찬 다짐은 이제 “우리가 꿈꾸었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다”는 식의 자조로 뒤바뀐다. 이 소년들은 미래에 덩그러니 남겨져 버렸고, 과거로의 여행과는 달리 미래로의 여행에서 미숙한 몸은 현실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는 ‘미래’가 우리 모두의 것, “공동”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면서도 모두가 같은 미래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회에서 지배적인 현실이란 무엇일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니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이 유행을 탈 무렵 헬조선에 관한 담론이 한창 부흥했던 건, 어떤 면에서 어른의 가치를 살려보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헬조선은 오직 자신만을 책임질 수 있는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이었고 그 안에서 한국은 명확한 지리적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헬조선에 관한 담론이 사라질 무렵, 이제 한국은 책임의 주체나 대상 모두가 모호해져 버린 상태로 남게 되었다. 헬조선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빠지면서 그냥 지옥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으로만 설명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런 일에는 책임을 묻는 게 불가하고 또 책임을 지는 일도 불가하다. 그러니 사람들에겐 그러한 책임을 져줄 어른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은 바로 그 ‘어른들’을 호명하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한때 사람들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통감했지만, 이윽고 사태는 지옥으로 변하면서 그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책임은 숭고의 가치를 갖게 됐고 ‘어른’은 세계를 구원할 용사의 역할로 지칭됐다. 사람들은 어른이 등장하기를 고대하면서, 그런 어른들에게서 제때 등장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 무엇보다 사과 이전에 어른의 존재 자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어른들은 미안해한다”는 말로써 가공의 주체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년성’이라는 말은 일종의 슈퍼히어로 서사에 비견된다. 사람들은 영웅이 진짜 있는지에 관계없이 이 사회에 영웅이라는 게 정말 있기를 바란다. 대가 없이 책임만을 지는 존재 말이다.
혹자는 바로 그렇게 책임만을 지는 존재를 두고서 부모나 선생 같은 성질을 떠올리고,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른’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등장해 오곤 한다. 가령 서브컬쳐 등지에서 목격되는 ‘마망형’ 인물의 등장은 우리가 ‘등가교환’의 시대를 벗어나 어떠한 교환비가 아닌 목격 이전의 무언가를 바라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된 일방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을 원하고, 여기에는 성적이거나 이성의 면모는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 혹은 아무 곳에 가지 않고 항상 여기에 있는 존재를 원할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사례로 들어볼 만한 [블루 아카이브]는 청소년 불가 게임이면서 동시에 소년성을 갈망하는 게임이다. 이는 특히 작품의 주된 이야기가 학생과 선생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한 그 관계가 선생은 학생이 나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준다는 점으로 인해 확언된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아이들의 고통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라는 대사로 요약되는데, 일본 서브컬쳐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이 게임이 근본적으로 한국 개발사의 작품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른과 아이의 관계는 허문영이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에 떠도는 소년들의 모습, 혹은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월호 이후의 달라진 소년성에 관한 한국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소년소녀’는 자신이 직접 책임을 마주하려 들기보다는 그런 책임을 짊어질 어른을 필요로 한다. 한국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정에 호소하며 바깥으로 나도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https://youtu.be/RmPUPU8Nwq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