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블루 아카이브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 그녀들은 너무 완벽했다.

서브컬처 게임의 판도가 일본에서 한.중으로 넘어간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소녀전선을 시발점으로 일명 씹덕겜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지 이제 8년. 한국에서도 블루 아카이브를 필두로 한 (필두랄까 아직 블루아카밖에 대 히트한 게임은 없지만) 씹덕겜의 태동이 산통으로 발전하고 있는 요즘, 씹덕 네이티브인 자신이 느끼는 서브컬쳐계의 변화, 그리고 서브컬처를 대하는 사회적인 인식에 대한 변화를 잠시 얘기해 보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서브컬처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나는 얘기하고 싶다. 예전에는 서브컬처란 말 그대로 하위문화, 즉 프라임 컬처와는 반대되는 음지의 문화로서 즐기는 사람도 매우 한정적이고, 또한 즐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핍박을 받는 그런 종류의 문화였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주류에서 도태되거나 스스로 유폐되기를 원했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문화였고, 서브컬처를 즐긴다는 사실은 곧 프라임 컬처에서 소외된 자들임을 뜻하는 말과 같았다. 직설적이고 독하게 말해 '정상적이지 않은 놈들이 즐기는' 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상(正常)에서 거리가 있는(전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즐기던 콘텐츠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며, 모 서브컬처 커뮤니티의 정신병 유병률은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전부 인정하겠지만, 평범한 커뮤니티의 그것보다 유의미할 정도로 높았다. 이것은 객관적으로도 특정 유형의 사람들이 모이는 매개체로서 서브컬처가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에 있어서는 그저 단순한 취향에 불과하겠지만 과거에는 낙인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서브컬처는 결코 밝고 재미있는 콘텐츠만이 아니었음을 이 글을 읽기 앞서 알아둬야 하는 사실이다.

서브컬처에 대해 말하자면 오타쿠가 빠질 수 없다. 아니, 오타쿠를 제외하고 서브컬처가 논할 수 있을까. 단연 없다. 서브컬처의 역사는 오타쿠의 역사이며, 예나 지금이나 서브컬처를 소비하는 인간은 오타쿠라는 자칭, 타칭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 무게야 다를지라도 과거의 오타쿠를 현재의 오타쿠들이 이어받았음을 의심할 수 있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확신으로 말의 순서를 바꿔 오타쿠가 곧 서브컬처를 만들고 있다고 해도 타당하다. 그러니까 오타쿠는, 곧 서브컬처의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인 것이다.

여기서 서브컬처의 특징이 하나 발견된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골수 오타쿠들이라면 경험이 있으리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동인지를 몰래 그려보거나, 원전의 설정을 빌려 와 나만의 취향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던 이차 창작이라는 행위를. 나는 이와 같은 행위들을 오타쿠라는 개인 자체가 곧 서브컬처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명확한 현대의 시장경제 안에서-생각해 보아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 중에 스마트폰을 오로지 설계하는 자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예외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경우는 곧 그것을 즐기는 이들의 풀 자체가 크지 않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풀 안에서는 어차피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수가 적기 때문에 생산자의 전문성이 조금 떨어진다 해도 절대적인 재화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새로운 자원의 투입은 기쁜 일이리라. 여기서 또 하나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일명 '동인'이라는 단어로 용서되는 퀄리티의 조악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아주 단축해서 요약하자면 오타쿠들이 즐기는 서브 컬처는 질은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너도 나도 참여할 수 있는 즐거운 언더그라운드 축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서브컬처는 어떤가. 서브컬처를 빙자한 거대 자본의 투입이 우리들의 눈높이를 한껏 올려놓았다. 한 이십 년 전만 해도 거대 자본은 서브컬처의 모태가 되는 '원작'을 제공하는 위치였다. 말하자면 뒤에 따르는 이차 창작은 오로지 소비자의 몫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근래는 어떠한가. 이제 우리는 거대한 회사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완벽하게 디자인한 콘텐츠들을 소비하는 대세를 따르고 있다. 이는 언뜻 보아 서브컬처의 겉껍질을 뒤집어썼으나, 설정과 스토리에 전혀 구멍이 없어 이차 창작의 자유도는 한없이 떨어지는 요람 안의 콘텐츠, 디즈니 같은 콘텐츠와 다름없어졌다.

자, 여기서 동방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아니 할 수 없다. 동방 프로젝트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인기를 끌고 있다. 동방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 나온 이후로 벌써 한 아이가 장성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굳건한 사회적 기반을 다질 만한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상당히 롱 런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는 뜻이다. 그러면 동방 프로젝트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얼마나 완벽하게 계획되고 설계된 대단한 프로젝트였기에!' 그러나 유감. 동방 프로젝트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콘텐츠다. 동방은 92년부터(자세히 기억이 안 나서 틀린 연도일 수도 있다.) 24년이 이르기까지 일부 격투 게임(췌몽상이나 비상천, 비상천칙 같은) 을 제외하고 공식 게임의 탬플릿은 거의 변하지 않고 이어져 왔다. 아주 짧은 사건의 프롤로그, 스테이지의 중간 보스와 보스전 개시 전의 아주 짧은 대화, 그리고 클리어 후의 아주 짧은 에필로그. 그것이 다이다. 더해서 인게임의 캐릭터 비주얼이 아주 좋은가? 원작의 그림체는 ZUN 그림체라고 불릴 만큼 독특하다 못해 얼이 빠진다. 그렇다면 그 많은 이차 창작은 대체 어디에서 쏟아져 나왔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원작의 불완전함.'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또 다른 얘기로 자꾸 새지만, 아주 오래된 모티프가 하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라는 전제를 주제로 한 기독교적 모티프이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기에 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신은 자신이 창조한 불완전한 존재를 가엽게 여겨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클리셰이다. 이건 사실 성서의 신약 그 차체라고 해도 좋을 이야기이다. 그만큼 오래되고 인간의 근본에 새겨져 있는 본능적 추구, 곧 인간의 불완전성과 그를 보완하려 노력하는 상상력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는 무신론적인 사고 아래에서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신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그렇다고 넘어가면 좋겠다. 아무튼, 불완전함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결국 이 끝에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콘텐츠의 불완전함이 곧 인간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차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여태까지의 설명으로 비로소 내가 왜 서두에 블루 아카이브에 정을 붙일 수 없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갔으리라 믿는다. 블루 아카이브를 플레이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블루 아카이브가 정말 잘 설계되고 멋지게 구축된 이야기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실제로 블루 아카이브는 굉장히 치밀하게 짜여진 콘텐츠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특성을 연구하기도 하고, 게임성 자체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거기에 더해 세련된 비주얼의 미까지 놓치지 않는 그야말로 오각형이 꽉 채워진 게임이다. 하지만 그 노력 때문에 나는 블루 아카이브에 정을 붙일 수 없어졌다. 누구나 쉽게 소비할 수 있는 밝은 콘텐츠로 바뀌어버린 서브컬처 속에서, 핍박을 받고 비정상이란 범주 안에서 언제나 고통을 참고 있어야 했던 어둡고 지저분하고 끈적거리는 오타쿠는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마저 리얼충에게 뺏겼다.라는 말이 있다. 말마따나 오타쿠 속성마저 리얼충에게 빼앗겨 버린 작금의 서브컬처 콘텐츠 속에서, 진짜 이빨을 갈던 이들. 한없이 우울하고 끈적이고 길을 잘못 든 정욕과 분노와 날선 자아들의 안식처였던 서브컬처가 프라임 서브컬처쯤의 양지로 끌어올려지는 행태를 두고 보지 못함은 비단 2세대 오타쿠 네이티브였던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과거 중2병 환자들에게 공감되는 바가 아닐까.

리얼충 폭발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