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고 열풍이 시사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미래

인터넷이나 SNS의 쇼셜미디어, CCTV 등이 늘어남에 따라 투명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 이러한 투명 사회는 과거 파놉티콘이 교모하게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 않나 우려가 된다. SNS나 블로그 기타 소셜 미디어로 내 개인적인 사생활을 낱낱이 자발적으로 밝히는 것은 또 다른 감시의 형태이고,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닐까? 중국이 CCTV 천국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8/27/K2CDZBJHGRANFIEXLZEILZFK74/?utm_source=bigkinds&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중국식 디지털 전체주의 전 인민을 감시하라

www.chosun.com

이하 내용 출처

‘포켓몬고 Pocketmon Go’라는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포켓몬고는 구글의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분사한 증강현실 AR 콘텐츠 개발사 나이언틱이 개발한 게임으로, 사용자는 스마트폰에 표시된 지도를 보며 이따금씩 등장하는 포켓몬을 포획하고 키울 수 있다.

게임의 인기가 어찌나 높았던지,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출시되기 전에 강원도 속초 등 일부 지역에서 게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속초행 버스표가 매진될 정도였다. 포켓몬이 출몰하는 지역에 사람이 몰리면서 아예 포켓몬고 여행상품을 출시하는 여행사까지 생겨났고, 지역사회와 기업들도 앞다투어 포켓몬고를 마케팅에 활용했다. 포켓몬이 자주 출몰하는 명소라고 홍보를 하거나 나이언틱에 직접 광고비를 지불하여 포켓몬을 출현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유인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포켓몬을 찾아 상점으로, 운동장으로, 공원으로 몰려갔다. 심지어 희귀한 포켓몬을 잡기 위해 위험한 장소에서 무리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포켓몬고 열풍을 단순히 게임 이용자들의 광적인 행동으로만 본다면 아직 디지털 빅브라더의 횡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포켓몬고의 개발사 나이언틱은 게임을 통해 사용자의 현재 위치, 이전 위치, 이동경로, 현재 바라보고 있는 것, 과거에 바라보았던 것 등의 사용자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나이언틱은 이 정보들을 활용해 얼마든지 사용자를 물리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고비를 받고 맥도날드에 희귀한 포켓몬을 출현시킴으로써 사람들이 맥도날드에 방문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단순히 광고를 보게 하거나 특정 콘텐츠를 클릭하도록 유인하는 것을 뛰어넘어, 오프라인에서도 사용자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여전히 포켓몬고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감시 자본주의 시대』를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의 저자 쇼샤나 주보프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 명예교수는 21세기 인터넷기업들의 사업 모델이 단순히 새로운 광고 수익모델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의 출현이라고 주장한다. 감시 자본주의란 사용자의 서비스 이용 내역을 감시해 데이터를 추출하고 변환하고 활용해, 사용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뜻한다. 쇼샤나 주보프 교수는 산업 자본주의가 자연을 훼손했듯이 감시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감시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은 ‘행동 잉여behavioral surplus’ 와 ‘행동 수정 behavioral modification’이다. 행동 잉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서비스 개선 외의 목적으로 수집하는 부수적인 데이터를 뜻한다. 사용자 위치, 나이, 직업, 라이프스타일, 취미 등에 대한 데이터가 행동 잉여에 포함되고 기업은 이를 활용해 이윤을 극대화한다. 행동 수정은 기업이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데이터를 활용해 사용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용자의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유도하는 것을 뜻한다. 푸시 알림을 보내 사용자의 친구가 SNS에 업로드한 콘텐츠를 보게 하거나, 광고비를 지불한 상점에 포켓몬을 배치해 사용자를 유인하는 것 등이 행동 수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쇼샤나 주보프 교수에 따르면, 감시 자본주의의 원조는 구글이다. 2000년대 닷컴 버블이 터지자, 구글의 사업 모델에 의구심을 품은 투자자들은 경영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후에 비해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이었던 구글은 주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재빨리 맞춤형 광고라는 사업 모델을 고안해 냈다. 사용자의 행동 데이터를 활용해 그가 흥미를 가질 만한 상품을 노출하는 맞춤형 광고는 오늘날에는 대단히 보편화된 방식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구글의 경영진은 검색 데이터로 사용자를 매 순간 감시하고 그들의 행동을 예측해서 선별적인 정보를 제공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먼저 깨달았다. 이것은 마치 헨리 포드가 정육점에서 작업자들이 조직적으로 소를 분해하는 모습을 보고 대량생산 컨베이어시스템을 고안해 낸 것과 같은 유레카의 순간이었다.

구글의 아찔한 성공과 우아한 사업 모델을 지켜본 인터넷 기업들은 너도나도 감시 자본주의를 시스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9.11 테러 이후 도래한 감시사회는 인터넷 기업들이 감시 자본주의를 실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구글이 개척한 감시 자본주의는 금세 인터넷 사업의 표준이 되었고 유사한 부류의 독점기업을 낳았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구글에서 글로벌 온라인 판매 및 운영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던 셰릴 샌드버그(그녀는 오늘날 마크 저커버그 다음가는 페이스북의 2인자이다)를 영입하고 비슷한 수법으로 사세를 확장해 구글과 자웅을 겨루는 디지털 빅브라더로 거듭났다.

감시 자본가들에게 사용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헨리 포드에게 T형 자동차를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하지 않고 손수 제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다. 감시로 추출한 사용자 데이터는 감시 자본가들의 지갑을 채워주는 이윤의 원천이다. 우리는 그들의 고객이 아니라 노동자이자 상품이요, 원재료에 불과하다. 스마트폰, 스마트스피커, 스마트워치, 스마트홈, 스마트카, 스마트칫솔까지! 미세한 센서가 부착된 온갖 부류의 스마트기기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추출해 낸 데이터를 중앙 서버에 전송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분명하고 난해한 말로 쓰인 약관에 무심코 동의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포켓몬고 열풍은 감시 자본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일상을 재미있는 게임처럼 만들어버림으로써 사용자를 온라인에서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감시하고 물리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게다가 조종당하는 대상이 무척 유쾌한 심정으로 기꺼이 게임에 참여하며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사실 또한 증명되었다. 오늘날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애플 등과 같은 디지털 빅브라더들은 공통적으로 게임 사업을 키우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있을까? 감시 자본주의의 미래는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행동 수정이 교묘하게 가미된, 전체주의적인 게임의 일상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놉티콘, 바놉티콘, 스마트 옵티콘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제됨에 따라 비대면을 뜻하는 ‘언택트Untact’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기술 도입이 가속화되고 재택근무, 원격 교육, 화상회의, 홈 트레이닝 등과 같은 언택트 문화의 산물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가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언택트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코 과거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살펴보겠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로 유명한 철학자 제러미 벤담. 그는 어느 날 동생이 일하는 작업장에 들렀다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수의 숙련 노동자가 다수의 비숙련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하고 있었는데 이는 작업장의 독특한 구조 덕분이었다. 제러미 벤담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보다’를 뜻하는 ‘Opticon’의 합성어인 파놉티콘은 모두를 본다는 뜻이다. 파놉티콘은 이중 원형 감옥의 형태로 중앙에 감시자가 머무는 원형의 탑이 있고, 이 주위를 피감시자들의 공간이 둘러싼 형태이다. 중앙의 감시탑에서는 피감시자의 모습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지만 외부 공간에 있는 피감시자는 중앙 감시자의 상태와 시선의 방향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피감시자들은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부터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제러미 벤담은 파놉티콘 건축 양식을 감옥, 학교, 병원, 병영 등과 같은 공공시설에 도입하면 공익이 증진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파놉티콘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파놉티콘의 감시 효율성이 주목받은 시기는 근현대에 접어들어 기계문명이 발전하면서부터이다. 국가와 기업은 구성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앞다투어 파놉티콘 건축 양식을 도입했다. 파놉티콘을 도입한 덕분에 공공 위생이 개선되고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는 등 공익이 증진되며 제러미 벤담이 이루지 못한 꿈이 실현되고 그가 전적으로 옳은 듯 보였다. 미셸 푸코가 파놉티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놉티콘’은 일종의 왕립 동물원이다. 단지 동물 대신 인간이, 특유한 무리 대신 개인별 배분이, 그리고 국왕 대신 은밀한 권력 장치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권력과 통제 메커니즘의 바탕에 파놉티콘이 있다고 주장한다. 원래 감옥과 병영처럼 위계질서가 있는 공간에서 주로 사용되던 파놉티콘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시민들이 감시당하는 것을 내면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파놉티콘 사회에서는 권력이 규율을 만들어 시민들을 감시하고 훈육하고, 시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권력에 순종한다.

한편 파놉티콘뿐만 아니라 바놉티콘Banopticon이라는 개념도 주목할 만하다. ‘추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Ban’이 접두사로 쓰인 이 표현은 감시와 규율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이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파놉티콘이 막연한 공포를 조장하고 권위를 앞세워 사람들을 훈육하는 체계라면, 바놉티콘은 체제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아예 시스템에서 배제해 버리는 구조이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대상을 명부에서 삭제하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바놉티콘의 처벌은 파놉티콘의 그것보다 더욱 무자비하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 빅브라더는 파놉티콘과 바놉티콘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우선 디지털 빅브라더가 파놉티콘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자. 디지털 빅브라더는 디지털 파놉티콘 중앙에 위치한 절대적 감시자이다. 과거에는 파놉티콘 감시자가 감시할 수 있는 대상이 고작 죄수 수십, 수백 명에 불과했다면, 오늘날 디지털 빅브라더가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감시할 수 있는 대상은 수억, 수십억 명의 사용자들이다. 디지털 빅브라더의 얼굴 없는 시선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또한 디지털 빅브라더는 ‘네트워크 효과’를 통해 바놉티콘을 구축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네트워크 효과란 특정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면 이것이 다른 사람의 수요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의미한다.

디지털 세계는 네트워크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는 곳이다. 특정한 디지털 서비스가 주목을 받으면 사용자가 그곳으로 우르르 몰리고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 기업은 시장을 선점한 대가로 승자독식 효과를 누린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카카오톡을 주요 메신저로 사용하고 페이스북 및 인스타그램에 일상을 공유하며 유튜브로 영상 콘텐츠를 시청한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서비스도 시장에 숱하게 많지만 사용자들은 쉽게 서비스를 옮기지 않는다. 떠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해당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고 다른 서비스에는 사용자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용할 유인이 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용자가 이용하느냐가 디지털 서비스의 성패를 가르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디지털 세계의 네트워크 효과는 바놉티콘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네트워크 효과를 구축한 특정 디지털 서비스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치명적인 결함이 생기지 않는 한 사람들은 쉽게 플랫폼을 떠나지 않는다. 가령 2014년 정보기관이 카카오톡을 사찰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카카오톡의 대안으로 텔레그램을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카카오톡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카오톡을 삭제하면 실시간 소통이 어려워지고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찰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카카오톡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바놉티콘의 위력은 이토록 강력하다. 3장에 소개한 각종 최첨단기술 때문에 앞으로 디지털 빅브라더가 감시하는 바놉티콘은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파놉티콘과 바놉티콘에서 더 나아가 ‘스마트 옵티콘Smart Opticon’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영리하게 대상을 감시하는 스마트 옵티콘은 감시의 수준을 질적으로 높인다. 다시 말해, 스마트 옵티콘은 ‘스마트’가 들어간 갖가지 최첨단 기기(스마트폰, 스마트워치, 스마트스피커, 스마트카 등)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사용자를 단순히 감시하는 것뿐 아니라 ‘조종’하는 것이다. 가령 기존의 파놉티콘과 바놉티콘은 감시 대상이 감시자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할 경우에만 조치를 취하는 다소 소극적인 감시였다. 게다가 파놉티콘과 바놉티콘은 규율과 추방이라는 무기를 통해 감시 대상을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스마트 옵티콘은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각종 조치를 활발히 취하는 능동적인 감시이다. 스마트 옵티콘의 감시자는 단순히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감시자는 감시 대상의 몸과 마음을 조종해 감시자가 원하는 (혹은 감시자에게 돈이나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끔 유도한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가 포켓몬고에 광고비를 지불하고 매장에 특정 포켓몬을 출몰하게끔 하면, 포켓몬고 사용자들이 우르르 맥도날드 매장으로 몰려가서 게임을 즐기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빅맥과 코카콜라를 주문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마트 옵티콘의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일련의 감시와 조종에 어떠한 규율이나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기하고 싶은 사실은 스마트 옵티콘이 스마트시티라는 미명하에 이미 전 지구적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은 스마트시티를 최첨단 디지털 서비스가 구현되는 혁신도시로 포장하지만, 스마트시티의 실상은 디지털 빅브라더가 통제하는 거대한 감옥이다. 실제로 중국을 필두로 전 세계가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장려하고 있다. 중국은 알리바바 본사가 있는 항저우를 스마트시티로 육성하고 있다. 알리바바가 개발한 인공지능 ‘시티 브레인City Brain’은 도시의 복잡한 교통문제를 해결한다. 시티 브레인은 5만여 대의 카메라를 통해 거리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최적화된 교통 솔루션을 제시한다. 또한 항저우시는 안면 인식 기술을 상점 결제뿐 아니라 학교, 은행, 공항 보안 등의 영역에도 도입해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시장 조사 연구기관 마켓츠앤마켓츠에 따르면, 글로벌 스마트시티 시장 규모는 2020년 4108억 달러에서 2025년 8207억 달러로 견고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자본은 이 거대한 시장을 결코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침 시민들을 통제하고 권력을 극대화하고 싶어 하는 정부와도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됨에 따라 스마트시티는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그 결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은 스마트시티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마치 산업혁명 이후 농촌이 급속도로 도시화된 것처럼 말이다. 스마트시티 시민들은 얼굴로 신원을 인증하고 결제를 하고, 24시간 하늘을 순찰하는 드론의 보호를 받고, 자율주행차로 최적화된 교통 경로로 이동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교묘한 감시장치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 같다. 때로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행복해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그는 적어도 스마트 옵티콘의 행복한 죄수로 복역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