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찾기
누구는 자기 부모가 너무나도 싫지만, 사실은 그 깊은 속 마음은, 그 부모와 화해하여 행복한 사이가 되는 것이 그 존재로서의 본심일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무의식은 자기 스스로도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눈 앞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와중에는, 전혀 눈치를 챌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시고, 더는 싸울 수 없게 된 때에, 더이상 관계를 좋아지게 할 수도 나빠지게 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그제서야 자기 자신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는 걸 깨닫고, 실제로는 화해하여 행복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본 마음은 줄곧 그랬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원신(元神)'이다.
사람들을 대부분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신을 찾은 사람들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100전 100승을 하며 흔들림 없이 성공하는 결과에 도달한다. 물론 이러한 승리에는 과장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힘든 시기 한 번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앎으로 인해서, 실패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나아가 이룬 최종적 결과만을 계산하여 '승리'로 채점한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실패가 나오는 지점마다 계산하여, 자신의 삶이 전부 실패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무얼 진정으로 원하는지. 즉 '원신 찾기'는 이 때문에 중요한 일인 것이다.
실전적으로는 아예, 찾지 않고 그냥 만드는 경우도 상당하다. '나는 OOO를 할 거야.' '나는 OOO를 원해' 하고 끝없이 되뇌여서, 아예 자기 자신을 세뇌하고 안드로이드 기계를 만들듯이 원신의 대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기도' 혹은 '기복신앙'의 방식이다. 강렬한 바램이 일을 이루는 것은, 그 존재가 실패에 집중하지 않고, 실패에 개의치 않고, 계속된 시도 끝에 결과에 도달하는 '멘탈'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루었다'면, 그 과정의 실패는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미화라며 고깝게 볼 일이 아니라, 참고하여 나의 성공으로 만들어야 할 일이다. 도전을 멈추면, 당연히, 도전을 멈추는 지점은 실패의 지점이기 때문에, 결론이 실패가 된다. 달성을 하려거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옳바르다.
그런데, 만들어진 원신은 실제의 원신이 아니다. 만들어진 원신은 일을 이루고 난 뒤에 길고 긴 공허와 무료를 낳는다(현타 온다). 반면 진정으로 바란 일은, 그것을 행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현타 없는 계속적인 만족감을 이끌어 온다. 그것이 '원신 찾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원신 찾기에는, 테크닉적으로 동원하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 정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등이다. 혹은 죽은 날에 묘비명에 무어라 기록되었으면 좋겠냐는 질문. 또는 삶을 마감할 때에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지 묻는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실험을 동원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기 어렵다. 결국에는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수 밖에는 없다. 원신 찾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삶에서 방황한 시기들은 무의미한 시기가 아니게 된다. 그 방황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알지 않고서는, 그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되는 일도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행복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야 하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당연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신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명(命)'이라고도 한다. 하늘이 우릴 부를 때 부여한 명령이 있다는 것이다. 이걸 해소하지 않고서는 한 존재로서의 참 만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 부족함과 갈증을 느끼고, 무언가 찾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압력을 받으며, 불만족 속에 늙고 죽어간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용어로는 '소명'이라고도 부른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첫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하고 말할 때의 '부르심을 받음'을 의미한다.
결국에는 사람은 원신을 찾고, 그 원신을 따라 멈춤 없는 실행에 이른 결과로 행복에 도달한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이와 같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주신 마음'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기도를 하면서도 'OO한 마음 주소서' 같은 말들을 많이 한다. 성경을 보더라도 성령이 임하여 무슨 말을 하게 되고, 성령께서 이끌어서 어디에 나아가게 되고, 그런 구절들이 성경에 수두룩하다. 성령께서 쉬지 않고 도전할 힘을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에서는 아예 원신을 '성령'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우리 안에 계신 원신, 즉 '성령'께서 주신 마음을 따라, 지침 없이 진취하게 되고, 이 과정을 통해 은혜와 감사를 느끼게 되며, 나아가 하나님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기쁨'을 누리는 것을 희망하는 신앙인 셈이다.
(예수 보혈은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계선이고 말이다. 예수 보혈이 있었으므로 이 과정이 가능하다는 것. 즉,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사랑하시고, 성령은 우리 안에 항상 계시므로, 예수님이 취하신 '상호 관계 개선의 액션'을 믿기만 한다면,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교인이 은혜를 알게 되고 영광을 드러내기까지는 다시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과는 무관한 일이다.)
한편 정직은 원신을 찾는 한 방법이다. 자기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말고, 자기 마음에 있는 좋은 말은 충분히 전하는 생활 태도를 지킴으로서, 무엇이 진정으로 자기 마음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알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항상 진심과 진정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반드시 더 깊은 진심과 진정을 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우물 물이 가만히 고여 있으면 도리어 썪고, 계속 사용하면 더 신선한 물이 계속 더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때문에 마음을 계속 찾고, 찾은 마음을 계속 표현하며, 마음 씀씀이 좋게 잘 사용해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의 자신'으로 존재하길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랬다가 저기서는 저랬다가 하면, 자기 자신의 진실된 내면, 그 내면의 본심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된다. 언제나 하나의 자신으로서 온전한 책임을 감당하고 온전한 책임을 성찰해야만, 그 '자기 자신'은 어디 도망갈 곳이 없어 반드시 찾아질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고, 그 외에도 '원신 찾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원신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의식하기만 한다면, 각자마다 자기 성향에 맞는 노하우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종교 전통을 열심히 따라가 보는 것도 좋고 말이다.